그리스-로마 세계, 곧 신약의 환경에서 입양은 널리 퍼진 관행이었다. 하지만 그 동기는 우리 시대와 달랐다. 현대 서양인들이 입양하는 이유는 한 가족이 홀로된 어린아이를 돌보기 위함이다. 고대 성경 세계 사람들이 입양한 이유는 입양된 아들이 그 가족을 돌보기 위함이었다.…남자아이가 없어 유산을 물려받거나 가족을 인도하고 보호할 상속자가 없는 경우도 많았다. 가족은 아들로 입양할 한 남자아이를 택해야 했는데, 그들이 볼 때 그가 가족을 돌볼 자격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성인이 아닌 아이를 입양하는 이유였다. 아이는 장차 가족을 돌보기에 적격이라 판명받았다. 그러므로 이런 목적으로 입양하는 것을 보통 ‘양자로 입양’한다고 불렀다.
---「1. 친족: 가족이 되다」중에서
엘리사는 여전히 보답하고 싶었다. 그는 그녀에게 무엇을 해주면 좋을지를 게하시에게 물어본다. 게하시는 그 여인에게 아들이 없고 남편이 늙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엘리사는 여인에게 곧 아이가 생길 거라 말한다. 이 예언은 여인의 환대와 돌봄의 선물에 대한 보답이다. 추측하건대, 수넴 여인은 처음에는 이 예언을 그저 덕담으로 여겼을 것이다. 아이가 생기자 이 예언은 관계를 변화시킨다. 이 지점에 이르기 전까지 여인은 이 불평등한 관계에서 자신이 후견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불현듯이 엘리사가 권능을 받은 사람임을 깨달았다. 그녀가 엘리사의 피후견인이다!
---「4. 후견: 제도와 구성원들」중에서
1세기 지중해에서, 하나님의 넘치는 ‘카리스’(은혜)에 우리는 당연히 ‘피스티스’, 곧 ‘믿음’으로 응답해야 한다. 나는 믿음이 무엇인지 알고 싶기에 1세기 후견의 맥락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피후견인의 ‘믿음’(피스티스)이란 후견인과 관련된 정보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를 신뢰하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진정으로 이루신 일을 우리가 믿고 신뢰하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을 신뢰한다면, 당연히 우리는 다른 후견인이나 보호처 찾기를 그만둔다. 우리는 어떻게든 하나님의 은총을 얻으려고 애쓰는 일도 그만둔다. 이제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카리스’를 이미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충실하다(pistis). 우리는 다른 후견인들을 물리치고 그분에게만 충성을 바친다.
---「5. 후견: 은혜와 믿음, 그리고 후견의 언어」중에서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부여된 명예를 소중히 여겼다. 그는 베냐민 지파 출신이고 바리새인의 아들이다. 또한 그는 획득한 명예도 소중히 여겼다. 바울은 엄격한 훈련을 받아 동년배 집단보다 뛰어났고, 전통을 사모하는 데 열심이었으며, 교회를 박해하는 데 으뜸이었다. 모두 다 그의 공동체(바리새인)에서는 명예였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 제자 무리에 소속된 뒤에는 이 새로운 공동체의 부여된 명예를 소중히 여겼다.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겸손하고 약해지고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며,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는다. 이것은 전혀 다른 가치였다. 그는 획득한 명예도 바꾸었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고 회중의 후견인이자 아버지가 된다. 바울의 가치관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이 새로운 가치들을 자랑한다. 이제 그는 이 가치들을 이전 생활방식의 가치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8장. 명예를 얻다: 누구나 명예를 더 얻고 싶어 한다」중에서
이렇게 시작된 명예 경쟁은 바알의 본거지인 산에서 승부를 겨룬다. 흔한 산이 아니라 갈멜산이다. 이 산은 바알이 처음 등장한 영토(페니키아)와 바알이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는 땅(이스라엘)의 경계에 자리해 있다. 주님은 바알에게 모든 이점을 양보하고 능력의 격차가 얼마나 큰지 보여 주신다. 바알은 원하는 장소를 선점하고, 소를 먼저 선택하며, 무기(번개)를 가지고 있다.
바알이 실패하자 주님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제단에 물을 붓게 하신다(물이 귀했던 때다). 유리한 것은 바알에게 모조리 몰아준 뒤, 주님은 불을 보내 제물을 다 태워 버리신다. 결론은 분명하다. 평판의 법정이 내린 판결이 공포된다. “온 백성이 이것을 보고, 땅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그가 주 하나님이시다! 그가 주 하나님이시다!’”(왕상 18:39).
---「9장. 명예 경쟁」중에서
예수님은 왜 시몬에게 수치를 주실까? 시몬이 이 여자가 공동체로 돌아오는 데 힘을 보태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몬은 그녀가 공동체의 가치에 따라 살지 않는다고 수치를 주었지만, 정작 시몬 자신이 그릇된 길로 갔다. 그는 여인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손님을 초대한 주인에게 공동체가 요구하는 중요한 가치를 실제로 지킨다. 우리는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여인과 시몬이 한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시몬은 이 여인에게 필요한 것은 용서라고 확신한다. 예수님은 시몬보다 더 용서가 절실한 사람이 그녀라는 것을 아신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이야기는 시몬에게도 지금 용서가 절실하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11장. 수치를 주다: 옳거나 그르거나」중에서
집단주의 사회는 경계를 사용해 공동체를 보호한다. 개인주자들은 경계가 우리를 제한하는 것 같아서 눈살을 찌푸릴 수 있지만, 집단주의 사회는 경계를 소중히 여긴다. 경계가 없으면 공동체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라는 말은 종잡을 수 없다. 기호에 따라 변하고, 현재 함께 있는 사람이 누구냐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성경 저자들은 여러 관행을 언급하면서 독자들이 경계를 알기를 바란다. 그러나 나는 개인주의자라 이런 점을 완전히 놓칠 수 있다. ‘우리’를 우리답게 지키는 경계의 역할을 놓칠 수 있다. 경계를 놓치면, 이야기의 핵심을 놓친다. 그러면 나는 바울을 경계를 넘어버린 자나 경계를 파괴한 자로 묘사할 수 있다. 실제로 바울은 올바른 경계의 열성적인 수호자였다.
---「13장. 경계를 수호하다: 우리를 온전히 우리로 만드는 것」중에서
내 한국인 친구는 어린 시절에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그는 자신이 학교에 간 첫날, 반 아이들에게 자기 소개를 한 이야기를 여전히 들려준다. 그는 “우리 아빠는 의사야”라는 말로 시작했다. 그러자 반 아이들이 박장대소했다. “왜 ‘내’ 아빠라고 안 하고 ‘우리’ 아빠라고 해?” 한 녀석이 낄낄댔다. 그는 상황이 이렇게 될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외아들이 아니었다. 그는 아빠를 좋아했는데,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아버지는 모든 형제의 아버지였다. 내 친구의 아버지는 모든 형제에게 ‘우리’ 아버지였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를 가르치셨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시고 나를 사랑하시지만,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하는 게 훨씬 성경적인 표현이다. 우리는 그분의 가족이 되었고 우리 아버지인 하나님과 동행한다.
---「14장. 친족과 경계를 구속하다: 누가 우리 가족인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