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술 마시는 느낌을 사랑했고, 세상을 일그러뜨리는 그 특별한 힘을 사랑했고, 정신의 초점을 나 자신의 감정에 대한 고통스러운 자의식에서 덜 고통스러운 어떤 것들로 옮겨놓는 그 능력을 사랑했다. 나는 술이 내는 소리도 사랑했다. 와인 병에서 코르크가 뽑히는 소리, 술을 따를 때 찰랑거리는 소리, 유리잔 속에서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 술 마시는 분위기도 좋아했다. 술잔을 부딪치며 나누는 우정과 온기, 편안하게 한데 녹아드는 기분, 마음에 솟아나는 용기. --- p.19
‘미친 짓이라는 건 알아. 하지만 이번 한 번뿐인걸. 이번 한 번은 스카치를 가져가야겠어. 이번 주는 정말 스트레스가 많았으니까. 스카치라도 마시면서 나를 달래고 싶어. 어때? 별일 아니잖아. 저녁 먹기 전에 내 방에서 작은 잔으로 한 잔 마시는 건데 뭐. 그러면 부엌에 몰래 들어가서 거기 있는 술을 훔쳐 마시지 않아도 되잖아. 내 술을 준비해서 아버지의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건데, 그게 별문젠가? 나름 합리적인 해결책이지.’--- p.24
나는 별장에서 식구들과 함께 앉아 있다가, 화장실에 간다고 나와서는 내 방에 몰래 들어가 가방에 숨겨온 스카치를 병째로 들이켰다. 술은 식도를 태우며 내려갔고, 나는 그 느낌이 좋았다. 그것은 따뜻하고 푸근했다. 만일을 대비해서 보험을 들어놓는 듯한 기분이었다.
보험, 바로 그랬다. 가방 속에 든 스카치는 내게 안전을 보장해주었다. 그로 말미암아 나는 저녁 식사 내내 마실 와인은 충분한지, 내가 술을 너무 빨리 마신다는 걸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는 않을지, 어떻게 해야 사람들에게 이상한 눈치를 보이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술잔을 다시 채울 수 있을지 조바심내지 않고 편안하게 식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욕구가 지나치게 강렬해졌을 때도 나 자신을 돌볼 수단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 p.25
술은 내 업무의 일부로 여겨졌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던져주는 매력은 눈부시게 강렬했다. 그들은 어둡고 고통받는 영혼이자 우리 같은 사람들보다 한 차원 깊은 인생을 사는 예술가들이었고, 술은 그런 인생과 예술에서 자연스럽게 뻗어 나오는 곁가지였다. 그것은 창조적 불안의 부산물인 동시에 해독제였다. --- p.32
맥주 몇 잔을 마시면 누구와도 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미간을 쪼그라들게 하던 것, 손을 멈칫거리게 하던 것, 아무리 긁어도 사라지지 않는 가려움증 같던 것이 스르르 씻겨 내려갔다. 그의 전 존재가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 p.101
아침 햇살 속에 눈을 뜬다. 머리가 무겁다. 너무 무거워 움직이는 것조차 고통스럽다. 안구 뒤쪽과 관자놀이에서 맥박이 불끈거린다. 격심한 고통, 끈질긴 통증. 두개골 속 뇌액이 찐득찐득해진 듯 머릿속도 아프다. 구토감이 인다. 빈속을 채워야 할지, 무언가 먹으면 상태가 더 나빠질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몸속의 모든 세포가 제멋대로 풀려 흔들리는 것 같다. 마치 배선 공사가 잘못된 자동차 같다. 그리고 옆자리에 남자가 누워 있다. 아는 사람일 수도 있고,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다. 한순간 당혹스러운 혼란이 몰려온다.
‘어떻게 된 거지?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얼른 주변을 돌아본다. 옷은 입고 있나, 벗고 있나, 피임의 흔적은? 콘돔 혹은 질 좌약 포장지는? 그러고는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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