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져 있듯이, 프레게는 현대 논리학과 분석철학의 창시자이다. 그는 『개념 표기법』(1879)에서 최초로 수학의 함수 개념을 일상 언어와 논리학에 적용하고 양화사를 발명함으로써 새로운 논리학을 체계화하였고, 『산수의 기초』(1884)에서 최초로 수에 대한 정의를 엄밀하게 제시함과 동시에 최초로 “논리주의”라는 수학철학의 입장을 제시하였으며, 「뜻과 지시체에 관하여」(1892)에서 “뜻”과 “지시체”를 구분함으로써 최초로 의미의 문제를 정교하게 다루었다. 그의 『산수의 근본 법칙 Ⅰ』(1893)과 『산수의 근본 법칙 Ⅱ』(1903)는 그의 그러한 노력을 집결한 결정체였지만, 러셀의 역설이 그 기념비적 저작을 좌초시켰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프레게는 또한 비트겐슈타인이 일생에 걸쳐 “위대한 사상가”라는 호칭을 부여한 유일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그만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프레게의 철학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프레게의 철학은 비트겐슈타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비판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논리-철학논고』(이하 ‘『논고』’로 약칭함)를 보면, 비트겐슈타인은 도처에서 프레게 철학의 어떤 점들을 인정하고 있고 동시에 여러 점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청년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프레게의 철학의 어떤 부분을 수용하였으며, 또 어떤 부분을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가?
프레게의 철학은 논리학, 수학, 논리주의, 의미 이론 등 폭넓은 영역에 걸쳐 있기 때문에 프레게의 철학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비판 또한 이 모든 영역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다. 이 광범위한 영역을 다루는 것은 한 편의 논문으로는 불가능하다. 나는 대신 이 글에서 프레게의 의미 이론에 초점을 맞추어 비트겐슈타인이 이를 어떻게 비판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프레게의 의미 이론은 뜻-지시체 이론으로 요약된다.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은 뜻-지시체 이론에 대해서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가? 우리는 바로 이러한 비판과 관련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의 “근본 사상”이라고 밝힌 내용이 , 그리고 왜 그의 “그림 이론”이 본질적으로 중요했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논의하고자 한다. 우리의 논의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프레게의 의미 이론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프레게는 모든 언어적 표현에 대해서 뜻과 지시체를 구분한다. 특히 그는 고유명사뿐만 아니라 문장도 뜻과 지시체를 지닌다고 간주한다. 그런데 이러한 구분은 소위 동일성 문장으로부터 발생하는 철학적 문제로부터 제기된 것이다(2절). 『논고』의 “근본 사상”은 프레게의 뜻-지시체 이론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의 단초이다. 특히 그것은 한 문장의 지시체는 진리치이며 진리치는 (프레게의 의미에서) “대상 자체”라는 생각에 대한 공격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그러한 대상은 실재하는, 또는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림 이론에 따르면) 이름과 명제의 기능은 근원적으로 상이하다(3절).
그런데 프레게의 (또는 프레게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이러한 비판이 불충분하다고 정당하게 응수할 수 있다. 요컨대 프레게의 “뜻”, “지시체”, “진리치”, “사상” 등은 모두 전문 용어인 것이다. 그리하여 비트겐슈타인의 프레게 의미 이론에 대한 결정적인 비판은 프레게의 이론 체계의 논리적 허점 또는 비정합성을 추궁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프레게가 한 문장의 뜻과 지시체를 도입하는 또 다른 경로가 있다. 그는 『개념 표기법』에서는 판단선과 내용선에 대한 논의에서, 그리고 「함수와 개념」 이후에는 판단선과 수평선에 대한 논의에서 한 문장의 뜻과 지시체를 다룬다(4절). 비트겐슈타인은 바로 이러한 프레게의 규정에 의해서는 복합문장의 뜻은 결코 해명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5절).
---「1. 들어가는 말」중에서
프레게가 현대 논리학을 발명한 것은 자신의 수학철학에서 원대한 기획을 실현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수학과 논리학이 정신의 내적 과정을 다룬다는 소위 심리주의와 관념론 철학을 배격하고, 수학을 확고한 기초 위에 올려놓기 위해 수학은 논리학으로부터 도출된다는 “논리주의”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수학철학적 작업에서 그는 수학적 대상이 실재한다는 수학적 실재론을 옹호하였다. 또한 이를 엄밀하게 논의하기 위해 그는 최초로 “뜻”과 “지시체”를 구분하게 된다. 그렇다면 프레게는 무엇 때문에 뜻과 지시체를 구분해야 했는가? 「뜻과 지시체에 관하여」의 시작 부분을 보면 그의 문제의식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동일성은 전적으로 대답하기 쉽지 않은 도전적인 물음들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관계인가? 대상들 간의 관계인가, 또는 대상들의 이름들이나 기호들 간의 관계인가? 나는 나의 『개념 표기법』에서 후자일 것으로 추정했다. 이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이 인용문을 보면, 프레게는 동일성이 무엇들 간의 관계인지를 묻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은 『개념 표기법』에서 기호들 간의 관계로 파악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파악이 그의 수학적 실재론과 상충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동일성이 기호들 간의 관계라면, 수많은 등식으로 이루어진 수학의 문장들은 기호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일 뿐 수학적 대상을 다루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프레게가 자신의 이전 생각에 만족하지 않았으며 오류가 있었다는 점을 시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개념 표기법』 §8의 다음 구절에 대해 만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용의 동일성은 내용들이 아니라 이름들에 관계됨으로써, 조건(conditionality) 및 부정과 다르다. 다른 곳에서는 기호들은 단순히 그것들의 내용들을 대표하고 그리하여 그 기호들이 나오는 각각의 결합은 모두 단지 그것들 각각의 내용들 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반면에, 그것들이 내용의 동일성을 나타내는 기호에 의해 결합되면 곧바로 그 자신들을 대표한다. 왜냐하면 이는 두 개의 이름들이 동일한 내용을 지니는 상황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용의 동일성을 나타내는 기호의 도입과 함께 모든 기호들의 의미에서 분기(bifuon)가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즉 기호들은 한때는 그것들의 내용을, 또 다른 때는 그것들 자신을 대표하게 되는 것이다.
프레게에 따르면, 동일성 기호를 제외한 다른 기호들은 그것들의 내용들을 대표하는데, 반면에 동일성 기호가 등장하게 되면 동일성 기호로 연결된 기호들은 그 기호들 자신을 대표한다. 그러면서 그는 앞에서 스스로 지적했듯이, 자신은 『개념 표기법』에서 동일성 문장이 기호에 관한 것이라고 간주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프레게는 동일성 문장이 기호에 관한 것이라고 간주했는가?
이에 대한 프레게의 설명은 이렇다. “A = A”와 “A = B”는 둘 다 동일성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인식적 내용에서 중요한 차이를 지니고 있다. 가령 ‘샛별’과 ‘개밥바라기’는 둘 다 금성을 가리킴에도 불구하고, “샛별은 샛별이다”는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 사소한 문장인데 반해, “샛별은 개밥바라기이다”는 천문학적 발견을 기록한 것이며 우리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그런데 만일 그 동일성 문장들이 모두 내용들에 관한 것이라면 ‘샛별’과 ‘개밥바라기’는 둘 다 금성을 가리키므로(둘 다 금성이라는 내용을 대표하므로) 그 둘은 어떤 차이도 없게 된다. 따라서 그러한 인식적 내용에서의 차이를 보이고자 한다면 동일성 기호로 결합된 문장에 나오는 양변의 기호들은 그 기호들 자신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프레게는 이제 「뜻과 지시체에 관하여」에서 다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즉 ‘샛별’과 ‘개밥바라기’는 는 동일하지만 은 상이하다. 그리하여 “샛별은 샛별이다”와 “샛별은 개밥바라기이다”는 둘 다 참이지만, 그 뜻이 다르다. 더 나아가 동일성 문장은 기호에 관한 것이 아니라 대상에 관한 것이다. 동일성 문장이 기호에 관한 것일 수 없는 이유는 기호와 지시체 간의 관련이 자의적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자의적으로 산출 가능한 사건이나 대상을 어떤 것에 대한 기호로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할 수 없다.” 즉 동일성 문장이 기호에 관한 것이라면 기호는 자의적이기 때문에 “샛별 = 개밥바라기”는 (케니(A. Kenny)가 지적하듯이) “천문학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사전상의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프레게는 가령 “5 + 3 = 22 + 4”에서 ‘5 + 3’과 ‘22 + 4’는 각각 8이라는 동일한 지시체를 가리키지만, 양자는 제시 방식(the mode of presentation)이 다르고 그리하여 뜻이 다르다. 프레게에 따르면, “고유 이름(단어, 기호, 기호들의 결합, 표현)은 그것의 뜻을 , 그것의 지시체(Bedeutung)를 () (). 우리는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그 뜻을 표현하고 그 지시체를 지칭한다.”그에 따르면, “한 고유 이름의 지시체는 그것을 사용하여 우리가 지시하는 대상 자체이다. 우리가 그 경우에 지니는 관념은 전적으로 주관적이다. 뜻은 고유 이름과 관념 사이에 놓여 있다. 뜻은 관념과 같이 주관적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대상 자체도 아니다.”
그렇다면 프레게가 말하는 “대상”이란 무엇인가? 프레게는 먼저 함수와 논항(Argument)을 구분한다. 예를 들어, 2 × 1 + 1, 2 × 4 + 4, 2 × 5 + 5라는 표현에서 공통된 내용이 바로 함수인데, 이는 “2 × ( ) + ( )”로 표현할 수 있다. 이때 1, 4, 5는 논항이다. 논항은 함수의 일부가 아니며, 함수와 결합하여 완전한 전체를 만든다. 함수 자체는 불완전한, 불포화된 것이며, 논항으로서의 1, 4, 5는 자립적인 대상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러한 함수-논항의 구분을 일상 언어에도 적용할 수 있다. 프레게는 「함수와 개념」(1891)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시저는 가울을 정복했다”는 문장을 ‘시저’와 ‘는 가울을 정복했다’로 나눈다. 두 번째 부분은 불포화되어 있다. 그것은 빈자리를 포함하고 있다. 이 자리가 고유 이름으로 혹은 고유 이름을 대체하는 표현으로 채워질 때에만 완전한 뜻이 나타난다. 여기에서도 나는 이 불포화된 부분의 지시체에 ‘함수’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이 경우에 논항은 시저이다.
케니(A. Kenny)가 지적하듯이, 프레게는 『개념 표기법』에서 ‘함수’와 ‘논항’을 일종의 언어적 표현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함수와 개념」(1891)에서 비로소 ‘함수’와 ‘논항’은 모두 나 으로 규정되고 있다. 이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프레게는 그 불포화된 부분의 를 함수라고 부르고 있으며, 논항은 ‘시저’라는 이름이 아니라 시저이다. 그렇다면 대상이란 무엇인가? 프레게는 이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제한 없이 대상들을 논항들과 함수의 값으로 받아들였을 때, 우리가 여기에서 대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생겨난다. 나는 어떤 정규적인 정의가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기에서 너무 단순해서 논리적 분석을 허용하지 않는 어떤 것을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의미된 것이 무엇인지 지적하는 것이 가능할 뿐이다. 여기에서 나는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한 대상은 함수가 아닌 어떤 것이며, 그리하여 그것에 대한 표현은 어떤 빈자리를 포함하지 않는다.
그런데 프레게는 ‘샛별’과 같은 이름, 또 ‘5 + 3’, ‘영국의 현 왕’과 같은 기술구뿐만 아니라 모든 언어적 표현에 대해서도 일관성 있게 뜻과 지시체를 구분하였다. 가장 특이한 것은 그가 한 문장에 대해서도 뜻과 지시체를 구분하였다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한 문장의 지시체는 (truth value)이고 그 문장의 뜻은 (Gedanke, thought)이다. 가령, “샛별은 샛별이다”와 “샛별은 개밥바라기이다”는 둘 다 참(The True)이라는 대상을 가리키며 따라서 두 문장의 지시체는 동일하다. 반면에 두 문장의 뜻, 즉 사상은 상이하다.
---「2. 프레게의 의미 이론」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