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혜는 이제 사랑에 대해 어떤 환상도 품고 있지 않았다. 첫 만남에서 어쩐지 낯이 익고, 두 번째 만남에서 동질감을 발견하고, 세 번째 만남에서 운명이나 인연을 거론하는, 그런 사랑의 환상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한때 인혜도 그런 식의 사랑의 환상을 믿은 적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 온몸이 감전되는 전율과 함께 찾아오는 천둥 번개같은 사랑, 순식간에 사방이 어두워지고 일상과 관습이 사라지는 정전같은 사랑, 온몸과 마음을 혼곤하게 취하게 하는 봄빛같은 사랑......
--- p.40
이게 사기죠. 세상은 멋진 거짓말입니다 나는 비커 아래쪽을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고통을 호소하지 않는다는 점, 슬픈 얼굴을 생존전략으로 채택했을 거라는 점,집착이나 애정이 형성되지 못한 점, 완강한 방어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 벌써 그 안에 있는 몇 가지를 보았다. 그럼에도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p.119
물결은 출러덩 뱃머리는 울러덩, 그대 당신은 어데로 갈라고 이 배에 올렀나......앞 남산 살구꽃으는 필락 말락 하는데, 우리 둘의 정이야 들락 말락 하네...... 이밥에 고기반찬을 맛을 몰라서 못 먹나, 사절치기 강냉이밥으는 마음만 편하면 되잖소...... 정선 읍내 일백오십 호 몽땅 잠들어라, 지부장네 맏며느리 데리고 성마령을 넘자...... 고기 잘 무는 납닥 꼬내기는 납닥돌 밑에 살고, 처녀 잘 무는 꼬내기는 내게도 있네...... 삽짝을 흔들면 나온다던 사람, 울타릴 부셔도 왜 아니 나와...... 왕모래 자락에 비오나마나 어린 가장 품 안에 잠드나마나...... 싫으면 말어라 너만이 여자더냐, 산 넘고 물을 건너면 또 여자 있겠지......
--- p.45, 46, 49, 51, 54
무슨 일을 하든 세진은 자신이 하는 일에 혼을 쏟았다. 마늘을 깔때면 속껍질을 벗겨 내는 손길이 마치 마늘을 애무하는 것 같았고, 방바닥에 엎드려 걸레질할 때면 방바닥과 사랑을 나누는 것 같았다. ................. 자신으로부터 등을 돌릴때조차 세진은 그 행위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 p.33,--pp11-16
면담자는 더는 말이 없었다. 나 역시 별로 할 말이 없었다.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부분이 노이로제이고, 아무것도 아닌 말에 상처 입는게 콤플렉스이듯, 그 사람이 선택하는 단어가 그 당사자의 상처였다. 그러고 보니 몇 가지 사례가 떠올랐다. 늘 '귀찮아'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 '무료하다'는 단어를 많이 쓰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바로 그 단어가 상처이겠구나 싶었다.
--- p.213
돌멩이나 들꽃에 관한 이야기
이를테면 이 이야기는 돌멩이나 들꽃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사소하지만 살인적인 고통이 될 수 있는, 보잘것없지만 천상의 위안이 될 수 있는, 삶에서 만나는 그 모든 돌멩이와 들꽃. 아무리 서로 사랑한다고 해도, 아무리 전 존재를 증여한다고 해도 인간이 서로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이란 결국 돌멩이나 들꽃에 불과한 게 아닐까.
--- p.9
*결혼이란 이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남성이라는 권력으로부터 승인받는다는 뜻이고,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에 승복한다는 뜻이고,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 편입된다는 뜻 아닌가요? 제도에 의해 보장된 남자를 통해 새로운 지위를 획득하고, 그의 권력을 나누어 갖고, 그가 성취한 것을 함께 누리며, 그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고자 하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죠.(1-29p)
*비로소 사랑의 위대함을 이해할 것 같았다. 누구든 건강한 퇴행에가지 이르는 사랑을 할 수 있으면 그 사랑은 무엇보다 자신에게 유익한 일이었다. 퇴행을 통해 오이디푸스 시절을 다시 겪어 내고, 누구의 내면에나 있을 법한 그 시기의 상처들을 치유하고, 그 시절에 결핍된 애정을 충족시키고, 그리하여 다시금 건강한 성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 고통스러운 시절로 절대 퇴행하지 못했던 것, 내 사랑 불능의 핵심 이유 한가지를 넘어선 게 틀림없었다.(2-171p)
--- p.2권 171
*결혼이란 이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남성이라는 권력으로부터 승인받는다는 뜻이고,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에 승복한다는 뜻이고,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 편입된다는 뜻 아닌가요? 제도에 의해 보장된 남자를 통해 새로운 지위를 획득하고, 그의 권력을 나누어 갖고, 그가 성취한 것을 함께 누리며, 그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고자 하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죠.(1-29p)
*비로소 사랑의 위대함을 이해할 것 같았다. 누구든 건강한 퇴행에가지 이르는 사랑을 할 수 있으면 그 사랑은 무엇보다 자신에게 유익한 일이었다. 퇴행을 통해 오이디푸스 시절을 다시 겪어 내고, 누구의 내면에나 있을 법한 그 시기의 상처들을 치유하고, 그 시절에 결핍된 애정을 충족시키고, 그리하여 다시금 건강한 성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 고통스러운 시절로 절대 퇴행하지 못했던 것, 내 사랑 불능의 핵심 이유 한가지를 넘어선 게 틀림없었다.(2-171p)
--- p.2권 171
' 가슴에 쌓인게 많아 그런 일이 생기는 겁니다. 가슴속에 응어리가 많은 사람, 마음 바닥이 맑은 사람, 거절할 줄 모르는 사람... 앞으로도 불교 공부와 수행을 꾸준히 하면서 마음속에서 그것들을 녹여 내야 합니다'
세진과 인혜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진은 무엇에 대해 고개를 끄덕였는지 모르지만 인혜는 수행에 대해서는 아니었다. 가슴에 쌓인게 많다는 말, 그것에 대해서였다.
--- p.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