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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7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120쪽 | 204g | 130*210*20mm
ISBN13 9788989224389
ISBN10 8989224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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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 매러 간다

초례청 병풍처럼 둘러놓은 앞산 뒷산
실경 속 낙관은 호미 날로 파고 새겨
완벽한 저 화폭마다 비바람도 풀어놓고

산 중턱 할배 부부 풀국풀국 마른기침
오지게 뽑던 잡초 그 번지 아직 남아
자갈밭 몇 대의 생이 두엄처럼 쌓이는 날

어머니 쓰던 호미 담보 없이 물려받은
다 닳은 호미날도 곧은 뼈도 금이 갔다
풀물 든 손금 사이로 움켜쥔 너의 운명


절벽에 서다

어머니 양말을 신고
어머니 옷을 걸친다
갇혀 있던 어머니의 냄새가 풀풀 난다
오늘은 굽은 허리 펴 나비처럼 가볍다

누렇게 흙이 묻은 엉덩이 땅에 뭉개며
밭콩 고랑 김을 맸던 호미도 관절 앓고
일 하다 마시던 소주병 빈속이 홀로 운다

낡은 벽에 걸쳐놓은 거죽 한 벌 주인이다
주름이 자글자글 겹겹이 상처인데
몇 번을 신으셨던가, 뒤축 환한 새 고무신

기쁨과 슬픔 삶과 죽음의 경계를 풀고
기억은 저물어서 그믐달로 가셨는데
지상은 옷자락 붙들고
생이별을 앓는다




물기 걷어낸 하늘이 저 높이 날아갔다
어둠은 밤늦도록 조각보를 펼쳐놓고
죽어간
벌레들 위해 휜 수의를 입혔다

아직도 마주잡은 손바닥을 놓지 못해
온기를 내려놓고 묵상에 든 어린 나무
달무리
몸에 두르는 저 풍경이 아득하다

엊그제 남은 잎을 다 떨궈낸 나뭇가지
반 꺾인 관절마다 바람이 와 매달릴 때
마침내
화려한 별이 폭포수로 쏟아진다


놋그릇을 닦다

어머니 그 어머니 생을 담은 그릇이다
기왓장 가루 내어 순금처럼 닦았지만
세상을 읽지 못한 눈
소박맞은 그릇이다

제물祭物을 담아내던 굽 높은 자존심도
한 생을 봉헌하고 구석으로 밀려나
가문의 한 증인으로
눈 못 감고 기다렸다

쓰던 그릇 신물 날 때 시간도 금이 가고
자궁 속이 그리운 어머니의 굽은 등뼈
마지막 남은 결기로
그 생을 다시 담다


안개

안개는 설악에만 피는 것이 아니었네

우주를 재고 있는 빨랫줄에 걸터앉아

눅눅한 새벽 한기에 스멀스멀 피어나네

호두산 그 물안개 처음으로 보았을 때

흐릿한 눈 속으로 젊음은 벌써 가고

새롭게 보이는 것이 있는 줄을 알았네

선잠에 하품하는 까닭 모를 눈물 한 촉

지상의 모든 안개 눈 속에서 조준한 듯

3.0의 시력이라면 안개는 필 곳이 없다


안경

빼어난 안목으로 높은 곳에 계시지만
두 다리 걸치고서 사람 몸에 기생한다
두 귀가 안 달렸다면
바닥을 기어 다닐

토끼 간을 빼어놓은 위기의 처세술이
1.0의 이력서에 두 다리를 용납하고
말갛게 둥근 유리창을
내 안으로 열어둔다

고집 센 눈동자가 세상을 읽는 동안
상처받은 두 눈이 자음 모음 구분 못해
당당한 너의 동정을
살피는 밤이 잦다


노도怒濤
-서포의 유배지에서

섬에 와 또 한 겹의 섬으로 내몰린 몸
한치 앞 알 수 없는 시퍼런 칼을 물고
바람이 파도를 벤다
멈칫 멈칫 떨리는 살

산을 눕힌 태풍이 세상을 바꾼다면
변방에 누웠어도 남은 생 후회 없을
잡은 붓 만장을 쓴다
결백의 하늘을 연다

사람 냄새 처음인 한 산맥이 주저앉아
동백이 피었다진 저 선혈을 어쩌리오
직필을 은유법으로
몽유도를 완성하다


마른 꽃

젖은 살갗 터지면 꽃잎이 되던 시절
나비처럼 날고 싶어 배반을 꿈꾸었다
붉은 피 거꾸로 솟는 탈출은 황홀하다

어느새 밤이 오고 모두 잠든 새벽녘
갈증에 숨이 막혀 물맛은 탁해지고
가끔씩 비명소리가 나직하게 들렸다

꽃병에서 뽑히던 날 관심은 내게 쏠려
따뜻하게 품어 안고 적막 함께 나눌 때
속눈썹 검은 언저리가 파르라니 떨렸다

마른 잎 푸석푸석 한 생을 견디지 못해
무슨 말 남길 듯한 싸늘한 검은 입술
마지막 남은 향기를 한 잎 한 잎 해체한다


분재원의 봄

모가지 잘려나간 밑 둥에서 잎이 핀다
겉껍질 속껍질을 다 찢기고 남은 살점
그래도 봄이 오는가
절로 눈이 뜨인다

사람들은 이 자태를 예술이라 칭찬한다
철사에 묶인 수족 자유는 옛말이라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다
세상 앞에 엎드린다


비상구를 찾다

퇴화도 또 진화도 물러섬이 아직 없다
고집을 사수하느라
사선으로 꺾인 눈썹
남편의 그 유전자는 갓끈에 묶여있다

결기를 지켜냈던 조선의 문서 같다
아니 더는 쓰지 않는
제 몸의 화살 글씨
달빛에 읽지 못하는 육필도 끝이 났다

이마에 누워있는 내 천川 자 일어선다
한 뺨씩 가까워진
우리 세간 복사꽃 길
수직에 맞닿지 않을 비상구를 찾는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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