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사랑이 시작되고 채 보름도 지나지 않아 꽉 찬 달이 하늘에 떠오르면, 서영은 꿈속에서 짐승으로 변해 그 사람을 먹어치웠다. 보름날 밤에 반드시 함께 있을 필요는 없었다. 현실에서 어디에 있든 그 사람은 언제나 그날 밤 꿈에 나타났고, 희생자가 되었다.
그리고 밤이 지나 태양이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낮이 찾아오면,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전날까지 거기 있던 감정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는 사실을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깨닫는 데는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 --- p.41
한서영의 글에는 그런 게 없었다. 그녀는 정직했고, 돌려 말하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대상에게 흠을 내지 않았다. 그렇게 쓰다 보면 정직함의 대가로 상처를 끌어안는 건 작가 자신일 수밖에 없을 거라고 소운은 생각했다. 그런 글을 쓰면서 사랑 이야기는 쓸 수 없다고 말하는 그녀는, 맥주 한 병에 얼굴이 붉어지는 그녀는, 시간이 갈수록 정말 이상한 방식으로 소운을 미치게 하고 있었다. 자신의 우상들을 완벽하게 알아맞히는 그녀를 보며, 자신의 책을 읽었다고 말하는 그녀를 보며, 소운은 점점 두려워졌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공격했다. --- p.92
하지만 그 꿈은 진짜였다. 꿈속의 생생한 감각도, 그 뒤의 끔찍한 기분도, 이별을 말하면서 어쩐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던 옛 연인들의 표정도 진짜였다. 온전한 짐승도 온전한 사람도 될 수 없어 꼴사나운 괴물. 짐승으로 한 짓을, 사람으로 돌아와 괴로워하는 존재. 그게 자신이었다. 서영은 여전히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상태로 살고 있었다. 익숙하고 끔찍한 감정이 밀려와 서영은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 p.99
서영은 친한 친구처럼 그녀의 어깨를 툭 건드려주고 싶었다.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군요? 겁내지 말아요.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동경하던 최소운을 만난 한서영이 아니라, 혐오로 가득한 세상 한복판에서 한 명의 퀴어를 만난 또 한 명의 퀴어로서, 그렇게, 그냥, 반갑게, 자매처럼. 하지만 정작 겁을 먹은 것은 서영이었다. 또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 견고하게 서영의 마음을 둘러쌌다. 서영은 웃으면서 생각했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할까. 최소운의 두 눈이 똑바로 서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거짓 없는, 그리고 숨길 수도 없는, 순수하고 무해한 기쁨이 배어나는 눈이었다. --- p.108~109
불가능했다. 지금 이 마음을 하나로 정의하는 일은 할 수 없었다. 한심한 여자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너는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냐고, 왜 모르냐고, 누군가 묻는대도 소용없었다. 서영은 도망치고 싶었고,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 신호를 지키고 싶었고, 동시에 빨간 불을 무시하고 무단횡단을 하고 싶었다. 변함없이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이번만은 다를 거라는 기대도 있었다. 지난번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기대, 그것을 어떻게 버리나? 사람으로서 그것을 버릴 수 있나? 서영은 다만 이렇게 거대하고 불가해한 힘 앞에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자신들에게 약간의 자비가 베풀어져, 기적이 일어나고, 아무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더없이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기원할 수 있을 뿐이었다. --- p.151
잃을까 봐 두려웠다. 그녀가, 떠날까 봐 겁이 났다. 우리는 이렇게 다르군요, 여기까지가 우리의 시간이군요, 그렇게 선을 긋고 마음을 접어버릴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항상성을 지키는 일이, 그런 평정심이, 더 이상 의미 있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늑대인간이었고, 보름달이 뜰 때마다 S가 아닌 무언가를, 아마도 세상을, 위험할 정도로 사랑하고 싶어 했다. S는 그 일에 대해 어떻게도 할 수 없었다. 그녀를 소유할 수도, 인간으로 바꿔놓을 수도, 그녀의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덮어쓰기할 수도 없었다. S는, 소운은, 늑대이면서 인간인 서영을 사랑하게 되어버렸으니까. --- p.216
서영은 소운이 자신을 구해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닫힌 공간에서 유리를 깨고 서영을 구한 것은 서영 자신이었다. 하지만 소운이 자신을 위해 해준 일들, 그 따스한 시선과 마음, 그녀가 아니었다면 깨닫는 데 훨씬 오래 걸렸을 어떤 것들을 그녀가 깨닫게 도와주었다는 사실마저 무시하면서 모든 것이 자기 혼자서 해낸 일이라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으니까. 서영은 소운을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고도 싶었다. 그녀가 필요했다. 사랑하는 일은 부끄러움 없이 그것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했다.
--- p.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