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의 성적 취향에 대해서는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그가 동성애적인 성향이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만, 당시에는 동성애와 이성애의 구분이 오늘날처럼 그렇게 분명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중략).. 미켈란젤로가 표현한 근육질의 청년이 그 대상(동성애의)이 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들어서는 <다비드>가 동성애자들의 우상이 되면서 많은 게이 잡지들이 그의 자세를 흉내내고 있다. 또한 1970년대에 페미니즘이 생겨나면서부터는 여성들이 조각의 뛰어난 몸매에 대한 찬사를 공공연히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매년 백만명이 넘는 관광객들을 아카데미아로 불러들이는 <다비드>의 위력은 그 육체적인 아름다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 작품을 통해 확신과 불안, 초인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그리고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켈란젤로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음미해 보기 바란다
"만약 인간 안에 있는 신성한 부분을 통해 누군가의 얼굴과 자세가 확연히 떠올랐다면, 그에 미치지 못하는 모델을 보고 작품을 제작한다 하더라도 신성한 힘이 돌에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그건 단순히 기술의 문제가 아니죠."
--- pp. 60~61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1962년 <모나리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국으로 건너오게 되는데, 이는 문화가 정치적인 목적에 이용된 대표적 예였다. <모나리자>의 대여가 있기 얼마 전, 미국 관광객을 태우고 애틀란타에서 파리로 가던 여객기가 르부르제 공항에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렇지 않아도 프랑스는 나토와는 별도로 독자적인 방위 계획을 추진하고 있던 드골 장군 때문에 미국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새로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된 앙드레 말로가 미국에 취할 수 있었던 우호적 제스처는 <모나리자>를 대여해 주는 것 외에는 없었던 것이다. 1962년 12월 중순, 드디어 그림은 프랑스의 르아브르를 떠나 뉴욕으로 향하는 항해길에 오르게 된다.
--- p. 105 다빈치의 <모나리자>
<절규>가 가지고 있는 극단적으로 주관적인 분위기와 표현주의적인 자유분방함에도 불구하고, 뭉크가 말로 묘사하고 그림으로 표현해 낸 무시무시한 하늘은(현대인들은 이 하늘을 보고 토마토케첩과 계란 노른자를 섞어 놓은 것 같다고 비꼬기도 했다) 북유럽에 종종 나타나는 '렌즈 모양의' 그림이라고 알려진 희귀한 자연현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늦은 가을에 비가 심하게 내린 뒤 차가운 공기가 습기를 서쪽으로 이동시키면, 이제 막 떨어지려는 햇빛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빨갛고 노란 띠 모양의 구름을 연출하곤 한다. 이러한 장관에 매혹된 예술가는 뭉크가 처음은 아니었다. 다비드 카스파 프리드리히의 추종자였던 J.C.C 달도 자신의 작품을 통해 그 광경을 표현한 많은 작가들 중 한 명이다. 그 외에도 뭉크가 그 끔찍한 경험을 했던 장소를 알아볼 수 있게 하는 몇가지 단서들이 더 있다. (중략)
하지만 뭉크에게 있어 그 장소는 매우 다른 의미를 가지는 곳이었다. 언덕 아래에는 바로 정신병원이 위치해 있었는데,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병원에서 종종 미친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화가의 동생 로라도 우을증에 시달리다 1892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떠한 근처에는 방목장과 도살장이 있어서, 이 역시 작품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뿐만 아니라 뭉크의 절친한 친구였던 칼레 로헨이 문제의 장소 근처에서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알기로 뭉크는 많은 종류의 뿌리 깊은 두려움을 알고 살았다. 낯선 사람에 대한 두려움, 여인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질병과 세균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텅 빈 공간에 대한 두려움...... 사실 그는 발작성 공황을 동반하는 광장 공포증을 앍고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일상적으로 광장 공포증에 수반되는 불면증과 가슴의 통증 그리고 격렬한 감정의 변화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가 매우 자주 겪었던 알코올 중독 역시 이러한 정신적 불안정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뭉크 자신이 적어놓은 그러한 감정 상태는 발작성 공황 증세를 잘 보여준다. 그 무렵 뭉크가 자신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은 작품의 맨 위에 가늘게 써놓은 문구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거기에는 "광인에 의해서만 그려질 수 있는 작품"이라고 적혀 있다. (이 문구를 정말 뭉크가 적어놓은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1905년 어떤 글에서는 "몇 년 동안 나는 거의 미쳐 있었다. 그 때 광인이 무시무시하게 얼굴이 뒤틀린 머리를 내밀었다. 여러분도 나의 그림 <절규>를 알고 있겠지만, 당시 낭는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 있었다. 내 피속에서 자연이 절규하고 있었고, 나는 터질 것만 같았다"라고 적고 있다.
--- pp. 266~269 뭉크의 <절규>
<절규>가 가지고 있는 극단적으로 주관적인 분위기와 표현주의적인 자유분방함에도 불구하고, 뭉크가 말로 묘사하고 그림으로 표현해 낸 무시무시한 하늘은(현대인들은 이 하늘을 보고 토마토케첩과 계란 노른자를 섞어 놓은 것 같다고 비꼬기도 했다) 북유럽에 종종 나타나는 '렌즈 모양의' 그림이라고 알려진 희귀한 자연현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늦은 가을에 비가 심하게 내린 뒤 차가운 공기가 습기를 서쪽으로 이동시키면, 이제 막 떨어지려는 햇빛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빨갛고 노란 띠 모양의 구름을 연출하곤 한다. 이러한 장관에 매혹된 예술가는 뭉크가 처음은 아니었다. 다비드 카스파 프리드리히의 추종자였던 J.C.C 달도 자신의 작품을 통해 그 광경을 표현한 많은 작가들 중 한 명이다. 그 외에도 뭉크가 그 끔찍한 경험을 했던 장소를 알아볼 수 있게 하는 몇가지 단서들이 더 있다. (중략)
하지만 뭉크에게 있어 그 장소는 매우 다른 의미를 가지는 곳이었다. 언덕 아래에는 바로 정신병원이 위치해 있었는데,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병원에서 종종 미친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화가의 동생 로라도 우을증에 시달리다 1892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떠한 근처에는 방목장과 도살장이 있어서, 이 역시 작품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뿐만 아니라 뭉크의 절친한 친구였던 칼레 로헨이 문제의 장소 근처에서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알기로 뭉크는 많은 종류의 뿌리 깊은 두려움을 알고 살았다. 낯선 사람에 대한 두려움, 여인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질병과 세균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텅 빈 공간에 대한 두려움...... 사실 그는 발작성 공황을 동반하는 광장 공포증을 앍고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일상적으로 광장 공포증에 수반되는 불면증과 가슴의 통증 그리고 격렬한 감정의 변화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가 매우 자주 겪었던 알코올 중독 역시 이러한 정신적 불안정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뭉크 자신이 적어놓은 그러한 감정 상태는 발작성 공황 증세를 잘 보여준다. 그 무렵 뭉크가 자신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은 작품의 맨 위에 가늘게 써놓은 문구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거기에는 "광인에 의해서만 그려질 수 있는 작품"이라고 적혀 있다. (이 문구를 정말 뭉크가 적어놓은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1905년 어떤 글에서는 "몇 년 동안 나는 거의 미쳐 있었다. 그 때 광인이 무시무시하게 얼굴이 뒤틀린 머리를 내밀었다. 여러분도 나의 그림 <절규>를 알고 있겠지만, 당시 낭는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 있었다. 내 피속에서 자연이 절규하고 있었고, 나는 터질 것만 같았다"라고 적고 있다.
--- pp. 266~269 뭉크의 <절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