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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얘라는 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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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얘라는 인형

이난희 | 파란 | 2018년 06월 26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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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8년 06월 26일
쪽수, 무게, 크기 151쪽 | 234g | 128*208*20mm
ISBN13 9791187756194
ISBN10 1187756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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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트리

젓나무가 한껏 몸을 열어 수백의 유두를 내민다 높은 지붕 위에도 끊임없이 돋아난다 말을

모르는 어린 별들 소리 없이 내려온다 종소리가 퉁퉁 불은 젓나무의 젖샘을 문지르며 수유 시간을 알린다

귤 상자에서, 컨테이너 옆 담벼락에서, 검은 비닐봉지에서, 공중전화 부스에서, 길바닥에서, 쇼핑백에서, 헌옷수거함에서, 공중화장실에서

탯줄에 매달린 울음이 도착할 즈음

깜빡 생각난 듯
젖꼭지를 입에 문 어린 별들
콩나무 줄기 같은 사다리를 오른다

아직
온기가 남은 울음을 쥐고

다시 태어난다 ***


첫서리

가위바위보
나는 숨어 있는 사람

누가 술래인 줄도 모르고 숨어들 때
함께 사라지고 싶은 것들
꽃들의 심장 소리 함께 듣는다

햇살 내려서고 그늘 뒷걸음쳐도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는 나는
방금 태어나고, 지금 막 버려진 사람

공중의 물방울 내려와 식어 간 탯줄 덮을 때
굳어 가는 내 잠을 시작으로 쥐눈이콩 서리태 울금까지
하얗게 지워진다

싱싱한 울음으로
배고픈 나는 떨어진 꽃망울을 물고 잠이 든다
자라지 않는 내 맨발은 날것들의 소란으로 근질거려

왜 아무도 날 찾지 않나

벌판에 서서, 구름에게 들키고
하얀 국화 향에 취해 재채기를 하고 싶지만
나는 숨어 있는 사람

아무도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아
허허벌판에 눈을 가리고 이제부터 내가 술래

당신이 찾을 때까지, 악몽은
찬 발 앞에 엎드려 나를 은폐한다 ***


호미꽃

구부러진 길에 꽃이 있다. 한 사람만 알고 있다. 갈라진 벽에 햇볕 들어서자 표정이 환해진다.

벽 속의 습기가 키워 낸 꽃 한 송이
자루 빠진 호미가 들고 있다.

어쩌다 여기 뿌리를 내렸나. 제 살점 떨어지는 줄 모르고 호미는, 꽃대를 추슬러 업는다. 곤히 잠을 자던 꽃잎이 호미 품을 파고드는 동안 등을 토닥이던 바람의 얼굴 붉어진다.

검버섯 핀 노인의 손이 호미를 누른다. 떨어진 녹 부스러기 평생을 파고들던 흙바닥을 품는다. 노인은 속을 긁어 대던 호미의 기억을 거름처럼 쓸어 모아 벽 틈새로 밀어 넣는다. 오므린 손금 안에서 빠르게 노을이 쏟아진다.

뒤꿈치를 든 꽃의 뿌리가 호미에게로 기울어진다. 탁 탁, 손을 털고 일어서는 굽은 허리가 가벼워진 햇볕을 업고 뒤란으로 사라진다.

아직 늙지 않은 꽃향기 무료한 그림자를 깨문다.***
--- 본문 중에서

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이난희의 시는 소재나 배경이 달라져도 시선이 바뀌지 않는다. 그녀는 길가 갈라진 벽에 핀 풀꽃과 뒤늦게 한센인이란 걸 알았다는 여자를 같은 톤으로 보여 준다. 그런데 갈라진 벽에 핀 풀꽃은 눈에 띌 수 있지만 한센인들은 어둠 속에 은폐되어 있다. 더욱이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케냐보다 과테말라보다 자메이카보다 더 아득한 곳에 있다. 그 존재조차도 지상에 지명으로만 남는다.
그러나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따뜻하게 시가 태어나는 자리에 풀꽃을 벽 틈새로 밀어 넣어 주는 노인을 보여 주고 시적 자아도 노인처럼 그들의 이야기를 꽃자수 보자기에 새겨 내어주고 싶다고 한다. 이와 같이 대표작 ?호미꽃?과 ?모닝커피를 마시다?를 마주하게 되면 그녀의 시가 생명에 대한 사랑과 고통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삶에 대한 기억이 가까울수록 그녀의 시 속에는 비유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비유가 들어선다 해도 비유는 비유끼리 서로 연대감을 갖고 결집하여 마침내 사회적 상처를 드러낸다.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햇볕 옆의 무허가 좌판과 무릎 꿇는 여자와 꽃눈과 학대받는 아이가 병치되지 않는 처절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시에서는 동화까지 상상을 넘어 아픈 현실에 편입된다.
그녀의 시는 인간적인 삶에서 소외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강렬한 고발시이다.
- 신대철 (시인)
말은 자아에게 세계의 고통을 일깨움으로써 무감각을 감각으로 바꾼다. 해서 이난희는 “새의 언어를 이해하자 나무들이 깨어납니다”라거나(?당신의 염려?), “죽은 말(言)들이 되살아난다”라고 노래한다(?반죽하는 시간?). 말을 한다는 것은 영혼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말의 반죽을 빚어 심연에서 기억을 부풀게 하는 행위이다. 텅 비어 있는 “모형 집”을 온기로 채우는 열기이다. 이를 통해 의식하지 못했던 기억이 소생하면서 “가짜 꽃”의 시간을 무너뜨리고 세계와의 연결을 회복시킨다. 말을 통해 시인은 ‘너’와 만난다(“어떤 문장으로 당신을 불러 볼까”, ?미지근한 시간?). 그러니 죽은 말이 되살아나는 시간은 사랑의 시간이기도 하리라.
이를 통해 우리는 시인이 시를 쓰는 동력이 무엇인지를 눈치챌 수 있다. 무감각한 “모형 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탈주의 욕망은 세계와 자아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인지하고 있는 시인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자아가 자신의 좁은 집 안에 갇힐 때 그는 자신과 세계가 차단되어 있다고 느끼며 동시에 자신의 고유성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다. 사회 안에서 정해진 규율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에 불과하다고 느끼면서도 그 가면을 벗어 버리지 못하고 가면 뒤의 동굴 안에 갇혀 버린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기에 타자에게 사랑을 베푸는 데도 인색해져 간다. 해서 시인은 타자의 고통에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한 윤리적 고민을 밑절미 삼아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탈구축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자아란 현존과 부재, 발화와 침묵, 감각과 무감각으로 기워진 누더기와 같다. 타인의 고통을 나누어야 한다는 당위에 공감할지라도 그것을 오롯이 실천할 수 있는 자는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통해 타자의 고통에 다가서려는 용기는 무엇보다 그 자신을 구원한다.
- 안지영 (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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