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에는 남한강 유역을 차지하는 나라가 한반도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통일신라 말 후삼국시기에는 신라왕실이나 고려의 왕건이 남한강 일대의 선종사원을 후 원하여 이들을 통해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남한강을 따라 조성된 여러 선종사원에는 당대 최고 수준의 불교문화가 꽃피었다. 사찰이 단순한 종교적 성소만이 아니라, 중앙권력과 결합하여 지방의 정치적·문화적 변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음을 잘 보여 주는 사례이다. --- p. 14
길(路程)은 인류역사의 발전과 문화의 생성, 소멸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역사공간으로서 ‘옛길’은 인류의 문화와 문화가 소통하고 문명이 교류했던 역사를 품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교통로의 의미를 넘어 이제는 하나의 ‘문화유산’으로 바라보는 인식들이 필요하다. --- p. 50
길은 서로 다른 장소를 연결해 주는 통로이다. 그러나 길은 단순히 이동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길은 관의 명령체계와 통치가 이루어지는 근본이고, 침략과 방어의 역할, 문화의 전파와 상업을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길을 따라 사람들이 왕래하면서 문화가 전파되었고, 농업기술이 보급되었으며, 산업이 발전하였다. --- p.88
18세기 전후 200여 년은 한국 역사상 문예부흥기로 일컬어진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조선은 17세기에 자기 학문으로서 성리학을 자리매김한 뒤 이를 바탕으로 18세기에 실학과 진경문화를 꽃피운다. 그 무렵 여행문화 역시 절정을 이룬다. 수많은 시인·묵객들 이 명승지를 찾아 글을 짓고 그림을 그렸으며, 여행기를 남겼다. 그들은 뛰어난 자연경관에 감탄하였고, 발로 밟은 옛 유적지에서 역사의 숨결에 심취하고, 선인들의 자취에 감흥하며 자연과 시간여행을 즐겼다. 이러한 여행문화로 인해 전국에 명산과 명승지가 크게 발달하였다. 그 가운데 ‘단양팔경’을 비롯한 충북 지역 남한강 주변의 명승지는 전국에서 으뜸이었다. 더욱이 뱃길로 풍류여 행을 즐길 수 있었던 남한강 명승지는 시인·묵객들의 관심 대상이었다. 그것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수많은 글과 여행기, 바위글씨, 그림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 p. 114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은 누구보다 서촌을 사랑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서촌의 곳곳을 그림으로 남겨 그 아름다운 모습을 오늘에까지 전하고 있다. 서촌을 담은 옛 그림을 통해서 근대 이후 그 아름다운 경관과 역사의 자취가 어떻게 사라졌는지, 그 어두운 욕망의 잘못들을 짚어 보면서 오 늘 우리가 과거의 유산들을 어떻게 지켜 가야 하는지 성찰하는 길을 떠나고자 한다. --- p. 146
전통시대 연행(燕行)은 국제교류의 통로이자 세계인식의 유일한 창(窓)이었다. 연행노정(燕行路程)은 ‘조선통신사노정’과 더불어 동아시아를 관통하는 문화교류의 중심축이자 소중한 역사 공간이다.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와 같은 조선 지식인들은 연행을 통하여 서세동점의 흐름을 인식하였고, 여행의 견문과 선진문물의 체험은 조선 후기 정신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 p. 172
조선 후기의 대학자 다산 정약용은 짧지 않은 생애,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 그의 활동과 작품, 사상 등을 채우려면 방대한 지면이 필요하다. 그의 삶과 관련된 유적지로는 일반에 많이 알려진 강진의 다산초당과 고향 마재를 들 수 있다. 그렇지만 초당이나 마재의 고향집만 둘러본다고 해서 끝나지는 않는다. 수십 년 동안 다산이 머물렀던 곳을 좀 더 상세히 살펴봐야겠지만 그 밖에 그가 다니고 머물렀던 여러 현장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 p. 206
지리산은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연을 품은 산이다. 때로는 신령한 모습으로, 때로는 버려지고 짓밟힌 사람들을 자애롭게 품어 주기도 했고, 새로운 세상을 꿈꾼 사람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기도 했다. 지리산 자락과 골짜기마다 애달픈 민중의 삶이 녹아 있기도 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들의 의지가 깃들어 있다. 이런 지리산을 찾아 역사기행을 제대로 하려면 저항과 반란의 거점이며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한 근거지가 되었던 역사와 지리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 p. 232
신자유주의 지구화, 글로벌 농식품 체계의 그늘이 점차 드러나면서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농업, 지역공동체의 의미, 사회적 경제의 잠재력과 가능성이 새로운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홍성군 홍동면은 근대적 농업이 추구한 자본 집약적 농업, 대규모성, 고도의 기계화, 단작 영농,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화학비료, 농약, 살충제의 광범한 사용, 집약 축산과는 다른 방식의 영농방법을 실험해 왔다. 홍동은 왜 한국 농업, 농촌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는지, 그 배경과 성공 요인을 역사의 현장을 따라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홍동의 지속가능한 농업, 마을 만들기 과정(성과, 한계, 과제)은 한국의 농업, 마을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척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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