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피디, 혹시 그 사내 게시판 올라왔다는 글 봤어?”
“네.”
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언은 지혁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그거 누가 쓴 거야? 내용이 뭔데? 기제국 다큐 캔슬된 거 관련이라며?”
“그게요…….”
지혁이 막 대답하려던 참이었다. 회의실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재희가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바로 문을 열었다. 밖에 서 있던 사람이 잠시 머뭇거리다 안으로 들어섰다.
정언은 잠깐만, 하고 지혁의 말을 끊으며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젊은 남자였다. 해사하다는 말이 딱 어울릴 법한 잘생긴 얼굴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훌쩍 큰 키에 댄디한 스타일은 덤이었다. 아나운서국이라면 모를까, 시보국에서는 어지간하면 보기 힘든 부류였다.
작가들이 즉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짧은 순간 무언의 감탄이 오갔다. 그것을 알아챈 정언은 픽 웃으며 다시 남자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이십 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앳된 얼굴에는 아직 소년 같은 느낌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다고 생각한 건 직후였다. 아무리 봐도 초면인데 왜 그런지 모를 노릇이었다. 연예인 누구를 닮아서 그런가 싶었으나, 정언이 아는 연예인은 한 손에 겨우 꼽을 정도였다.
정언이 기억을 더듬는 사이, 재희가 파란색 PP 박스를 품에 꼭 안고 선 남자를 가리켰다.
“이쪽은 오늘부터 우리 팀에서 일하게 될 김윤 피디. 인사해.”
목에 건 사원증의 사진과 이름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사보 표지 사진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정갈한 증명사진 아래 선명하게 김윤이라는 이름 두 글자가 박혀 있었다.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에 긴장했는지, 윤이 마른 입술을 한 번 축이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늘부로 교양국에서 시사보도국 3부로 발령받은 김윤 피디입니다.”
교양국에서?
정언은 눈썹을 좁혔다. 부서 이동 시즌은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 교양국에서 갑자기 여기로 온다는 건 이상했다. 뭔가 싶어 의아한 기분이 되었다.
재희가 정언을 불렀다.
“서 피디.”
퍼뜩 현실로 돌아온 정언은 네, 하고 대답했다. 재희가 손에 들고 있던 펜으로 윤 쪽을 가리켰다.
“서 피디가 김윤 피디 사수 맡아. 김 피디 이제 2년 차고 교양국에만 있어서 우리 쪽 일 낯설 테니까 차근차근 가르쳐 줘. 아, 서 피디 오른쪽 자리 비어 있지? 우 피디가 이따 회의 끝나고 자리 세팅 도와주는 걸로 하고.”
윤의 얼굴에 바짝 얼어붙은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봐도 자원해서 온 사람 같지가 않았다. 눈을 깜빡이며 사람들을 둘러보던 윤의 시선이 문득 정언과 마주쳤다. 정언이 그 눈을 빤히 마주보자, 윤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
그러기 무섭게 맞은편에 앉은 조혜주 작가와 성희림 작가가 자기들끼리 뭐라고 소곤거렸다. 소리 없이 꺅꺅대는 걸 보니 보나마나 잘생겼다는 얘기일 게 뻔했다.
그러나 정언에게는 그 잘생긴 얼굴이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쓸데없이 웃음이 헤픈 남자는 취향이 아니었다. 게다가 정언에게는 지금 대체 쟤를 어디서 봤을까가 첫 번째, 여기 어울릴 타입이 아닌데 얼마나 버틸까가 두 번째 의문이었다.
한 사람이 아쉬운 판이었지만, 이제 가르치기 시작해서 폐지하기 전까지 써먹을 날이 오긴 할지도 막막했다. 그나마 2년 차라면 일 돌아가는 건 어느 정도 알지 않을까 하는 데 희망을 걸어야 했다. 선배는 왜 하필 나한테 저걸 붙이고 그래, 하며 정언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
“신참이면 자기소개 좀 해 봅시다.”
“네? 아, 네.”
퍼뜩 놀란 윤이 박스를 더 꼭 안았다. 그게 아주 귀여워 죽을 지경인지, 혜주와 희림의 입이 귀에 걸렸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정언은 턱을 괴었다.
입봉 이후 자신의 서브 자리를 거쳐 간 후배들은 두 손으로 몇 번을 꼽아야 할 정도였다.
정언은 후배들에게 그다지 상냥한 선배는 되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하드한 팀이었다. 신입들이 곁을 잘 주지 않고 엄격한 선배 밑에서 오래 버티는 건 당연히 힘든 일이었다. 정언도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굳이 후배들을 위해 성격을 바꿀 마음은 없었다.
정언은 윤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얘는 한 달이나 갈까. 아무래도 교양국에나 계속 있었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라 영 믿음이 가지 않았다.
주저하던 윤이 입을 열었다.
“김윤입니다. 입사한 지 2년 차고, 올해 스물아홉입니다.”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스물아홉이라. 보기보다 동안이네, 하고 정언은 무심코 생각했다. 사원증이 없었다면 대학생 아르바이트라 해도 그러려니 할 것 같았다.
윤을 아래위로 훑어보자, 지나치게 멋 부린 것 같지 않으면서도 깔끔하고 세련된 착장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큰 키에 팔다리가 길어 옷걸이가 좋은 것도 그 괜찮은 스타일에 한몫하고 있었다. 한눈에도 곱게 자란 티가 역력했다.
“스물아홉이면 지혁 피디님이 한 살 어리니까 계속 막내겠다. 키 몇이세요? 되게 커 보이시는데.”
“185입니다.”
희림의 물음에 윤이 멋쩍게 대답했다. 현진이 오오, 하고 감탄했다.
“우리 팀 최장신이구만. 촬영할 때 엄청 편하겠네. 결혼은 아직이지?”
“네.”
긴장한 탓인지 대답이 군대식이었다. 정언은 팔짱을 끼며 그런 윤을 주시했다. 현진의 질문이 이어졌다.
“교양국에서 뭐하다 왔어?”
“교양국 1부 [오늘의 요리] 팀에 있었습니다.”
다음 순간 회의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귀를 의심하는 얼굴로 윤을 주시했다. 정언은 눈썹을 좁히며 방금 들은 말을 되새겼다.
[오늘의 요리]?
천국 중의 천국으로 이름난 프로그램이었다. 일 적고 야근 없기로는 따를 팀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만약 지금 여기서 한 명을 [오늘의 요리]로 보내 준다면, 자신과 재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머리채를 잡고 싸울 수도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여기서 거기로 가는 것도 아니고, 거기서 여기로 왔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