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자화상에 대한 하나의 종합 정리된 이론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실은 그것은 불가능한 미션일지도 모른다. 자화상이라는 장르가 가진 면면은 그만큼 다종다양하기 때문이다. 자화상을 다각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 책은, 느슨하지만 연대기적으로 구성돼 있다. 각각의 장은 묶인 주제에 따라 독립적이지만, 반에이크에서 시작해 신디 셔먼의 사진 같은 현대의 자화상까지 다룬 다음, 다시 16세기 후반 이탈리아 화가 안니발레 카라치의 시적인 자화상으로 돌아가 끝을 맺는다. 그러는 중에 지은이는 자화상에 대한 여러 의문을 제기하고 정보를 전하며 자화상이라는 매혹적인 장르를 찬미한다. 지은이의 서술을 따라가면서 독자들은 자화상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묶일 수 있는 그림들의 면면이 얼마나 다양하고 풍부한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장. 비밀
반에이크는 「참사회원 헤오르흐 판 데르 파엘레와 함께 있는 마돈나와 아기예수」에서 성 조지가 입은 청동 갑옷에 희미하게 자신의 반영체를 그려넣는다. 미술사가들은 이 이미지가 ‘자화상’이라는 것을 좀체 인정하지 않는다.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은이는 「아르놀피니 초상」의 뒤편 거울에 비친 남자의 초상까지 면밀하게 살펴보며 이 작은 이미지들이 화가가 바라본 세계와 그림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형이상학적 깊이를 지닌 자화상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2장. 눈
자화상의 ‘시선’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관람자들은 초상화나 자화상을 볼 때 그림 속 인물이 바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기 쉽다. 이것은 실은 화가들의 의도이기도 했다. 눈을 어떻게 표현해내는가, 또 얼마나 잘 표현해내느냐에 자화상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자코포 틴토레토가 젊은 시절 그린 자화상은 그 강렬한 눈빛으로 관람자의 시선을 잡아끈다. 반대로 시선의 처리에 미숙해서 실패해버린 자화상도 있다. 스위스 태생의 화가 안톤 그라프의 자화상이 그런 예이다. 그 외에도 눈을 통해 다양한 표정을 연기해낸 렘브란트, 한쪽 눈만을 드러낸 채 눈썹을 추어올려 관람자들과 비밀 대화를 시도하는 리피, 꼭 감은 눈으로 내면의 풍경을 드러내는 클레의 자화상도 소개된다.
3장. 뒤러
이 장은 온전히 뒤러의 자화상에 할애된다. 그중에서도 중심에 있는 것은 지은이가 “자화상의 알파요 오메가”라고 표현한 1500년 작 자화상이다. 이것은 마치 예수와 같은 도상으로, 그림이 그려진 이래 수많은 애정을 받아왔고 심지어 분노나 혐오를 이끌어내기도 한 자화상의 대표 격인 작품이다. 완벽한 정면상인 이 자화상은 불가사의한 분위기를 뿜어낸다. 지은이는 뒤러가 열세 살 때 그린 자화상부터 이 1500년 작 자화상까지 짚어가며 그 불가사의함의 정체를 탐색해보고자 하지만, 이 위대한 그림은 여전히 신비로움을 간직한다.
4장. 모티프, 수단, 기회
화가들은 왜 자화상을 그릴까? 이 장은 화가들이 자화상을 그린 다양한 이유들을 다룬다. 초상화는 그려진 이유가 명확하다. 적어도 누군가가 초상화 속 인물이 그려지기를 바랐고 그에 대한 대가를 화가에게 지불했기에 그려진 것이다. 하지만 자화상은 그렇지 않다. 때로 화가들은 자신의 의지에 반해 자화상을 그리기도 했다. 푸생은 친구의 끈질긴 요청에 마지못해 붓을 들었고, 미켈란젤로는 순교한 성인의 벗겨진 살가죽으로 자화상을 그림으로써 ‘살을 벗고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면죄에 대한 소망을 나타냈다. 그런가 하면 연인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가 그런 사적인 내밀함이 대중에 공개될 것을 두려워해 지워버린 쇠라의 경우 도 소개된다.
5장. 렘브란트
지은이가 “자화상의 영혼이자 자화상을 이끄는 빛”이라고 묘사한 렘브란트에게 온전히 할애된 장이다. 80점이 넘는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가장 오랫동안 그려진 자화상들이며 예술사에서 다시 볼 수 없는 변화와 쇠퇴의 기록이다. 젊고 자신만만한 화가의 자화상에서부터 늙고 파산했으며 주위에 아무도 남지 않은 화가의 내면이 절절하게 드러나는 깊이 있고 진실한 만년의 자화상까지, 렘브란트 자화상의 세계, 그리하여 그의 생애와 예술을 살펴본다.
6장. 무대 뒤편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의 모습이 담긴 자화상이 이 장의 중심 모티프이다. 혼신의 힘을 다해 거대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여성화가 젠틸레스키는 그림을 그리는 데 몰두해 관람자 쪽은 전혀 쳐다보지 않는다. 그녀에게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자신을 그린다는 것은 자신이 여성이자 뛰어난 재주를 지닌 화가임을 보여주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담은 자화상은 자기를 밝히는 가장 단순한 형태이자 스스로를 화가라고 선언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제 조직적인 작업실 환경과 더 이상 신비롭지도 않은 억대의 사업이 돼가는 현대미술의 성격 때문에 작업 중의 화가를 그리는 전통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가장 최근의 ‘작업 중의 화가’라고 할 필립 거스턴의 「작업실」은 “화가는 예술과 분리될 수 없는, 계속 진행되는 전통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7장. 벨라스케스
이 책에서 온전히 한 사람의 화가에게 할애된 장은 뒤러, 렘브란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벨라스케스뿐이다. 여기서 다루는 벨라스케스의 자화상은 심지어 단독 자화상도 아니다. 벨라스케스는 그의 최고의 걸작 「라스 메니나스」에서 왼쪽 화포 뒤에 등장한다. 이 그림은 갤러리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그림 속 세상에 초대된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더욱 신비로운 것은 마치 관람자가 존재함으로써만 그림 또한 살아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이 생생한 세계의 창조자로서 벨라스케스는 그림 속에 서 있다. 그리고 그가 그림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공주와 시종, 펠리페 4세의 가족과 우리의 세계가 만나는 것 같은 환영이 완성된다. 이 장은 벨라스케스의 걸작 「라스 메니나스」와 화가에게 지은이가 바치는 찬사이다.
8장. 거울
거울의 존재는 자화상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사진이 등장하기 전까지 자화상을 그린 화가들은 거울에 의존했다. 초상화에서 화가는 넓은 세상의 다른 사람을 내다보지만, 자화상에서는 거울이 세상을 좁혀 거울 속에 가둔다. 그리고 화가는 그 거울 속에 갇힌 풍경에 집중한다. 그것이 자화상의 세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거울이 자화상에 함께 그려진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렘브란트는 거울을 한 번도 그린 적이 없고 반 고흐는 방 안의 모든 물건을 그리면서도 거울만큼은 그리지 않았다. 한편 미국의 화가 노먼 로크웰의 「세 명이 있는 자화상」은 거울에 비친 모습과 화면에 그려진 자화상의 거리를 재치 있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장에는 자화상과 거울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내용을 다룬다.
9장. 연행
하나의 연극 무대로서 자화상을 바라보는 장이다. 여기서 자화상은 화가가 치밀히 계산하여 ‘관객’에게 드러내고자 한 무대와 연기를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실제로는 유쾌하고 떠들썩한 인물이었던 살바토르 로사는 ‘침묵하는 금욕주의 철학자’로서 자신을 그렸고, 모리스 켕탱 드 라 투르는 어마어마한 작업량에 시달리고 있으면서도 노동 따위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듯한 행복하고 산뜻한 미소를 띠고 관객을 바라본다. 엘리자베트 르브룅은 수줍고 아리따운, 친밀한 여인으로서 자신을 그려 고객들을 초대했다. 일종의 ‘쇼’로서 기획된 자화상들을 만날 수 있다.
10장. 무대 공포증
모든 화가들이 기꺼이 자화상을 그렸던 것은 아니다. 헨리 레이번 경은 로열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자화상을 출품했다. 이상한 점은 뛰어난 초상화가였던 그가 자신을 그리는 데는 더듬거렸고 결국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는 모습을 그리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는 점이다(설상가상으로 아카데미의 초상화 부문에는 자화상을 출품할 수 없는 규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레이번 경을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자화상을 그리는 데 있어 무의식적인 불안을 드러냈던 화가들, 혹은 자신의 본모습을 애써 감추려 했던 화가들의 경우를 살펴본다.
11장. 외로운 영혼들
자크-루이 다비드의 유명한 자화상은 실은 그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려진 것이다. 프랑스혁명에서 로베스피에르의 추종자로서 자코뱅 당 일원으로 활약한 다비드가 로베스피에르의 권력이 무너지고서 갈 길을 잃었을 때 그려진 자화상인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보면 그의 눈빛에서 당황함과 흔들림을 읽을 수 있다. 이 장에서는 세상에 홀로인 존재로서 자신을 그린 자화상들을 살피며 추방당한 천재로서 고립된 자라는 화가에 대한 낭만주의적 관념과 낭만주의적 자화상에 대해서도 알아본다.
12장. 자기애
자화상에서 나르시시즘에 대해 다룬다. 그 중심인물은 쿠르베이다. 부상당한 남자, 첼로를 켜는 남자, 부자에게 존경받는 천재 등 언제나 이야기의 중심인물로서 자신을 등장시켰던 다양한 쿠르베 자화상들을 살펴보고, 자화상을 그리는 주요 모티프 중 하나였던 허영, 자기애에 대해 논한다.
13장. 피해자
연인과 헤어지고 지옥 불 속에 서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재현한 뭉크, 역시 연인에게 버림받고 자신의 잘린 목을 들고 있는 연인의 모습을 그린 알로리,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 잘린 골리앗의 머리로 자신을 그린 카라바조, 전쟁에서 입은 내면의 상처를 잘린 팔로 표현한 키르히너 등 ‘피해자’로서 자신을 재현한 화가들의 경우를 살핀다. 어쩌면 피해자로서 자신을 그린 화가들은 자기애라는 측면에서 보면 나르시시즘에 빠진 화가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지도 모른다. 반면 피해자로서 자신을 그린 것이 일종의 저항이자 고단한 현실을 견디는 힘이었던 프리다 칼로나 트레이시 에민 등의 경우도 소개된다. 이런 자화상들은 관람객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부추기는 힘마저 갖고 있다.
14장. 선구자
가장 비극적인 화가라고 알려져 있는 빈센트 반 고흐는 자화상을 그릴 때 실은 티끌만큼의 자기연민도 넣지 않았다. 그의 자화상은 그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해주긴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스타일을 밀어붙인 결과였다. 모더니즘의 등장, 혹은 자연주의적 구상주의의 종말과 함께 자신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는 화가들에게 하나의 문제가 되었다. 색면 추상으로 유명한 몬드리안 같은 화가는 자화상을 그릴 때만큼은 구상미술에 의존했지만 피카소나 잭슨 폴록은 적어도 그들이 입체파로서, 추상표현주의 화가로서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한 후에는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다. 이 장에서는 이처럼 자신의 양식을 추구하면서도 자화상을 남기고자 하는 문제에 관한 딜레마에 대해 이야기한다.
15장. 무너트리기
그리고 드디어 자화상의 도구로서 사진이 등장한다. 신디 셔먼이 대표적인데, 재미있는 것은 이 사진들이 바로 신디 셔먼의 자화상이면서 동시에 ‘기성복처럼 갈아입을 수 있는 자아’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 장에서는 사진이 가진 객관성을 이용해 흔들리는 자아에 대한 자화상을 제작한 여러 작가들을 소개한다. 멀리 19세기의 카스틸리오네 백작부인부터 앤디 워홀, 제프 월에 이르기까지 자화상으로 자신과 자아에 대해 “우리는 절대 고정된 존재가 아니며, 끊임없이 변화하며, 하루하루 달라지는 자아의 총체일 뿐”이라며 문제를 제기한 작가들을 만난다.
16장. 작별
다시 시계를 돌려 1604년경 그려진 안니발레 카라치의 「작업실 이젤 위의 자화상」을 만난다. 이 그림에서 화가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이젤 위에 올려진 화가의 자화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카라바조에 필적할 만한 화가였으며 파르네세 궁의 천장화를 완성한 화가가 그린 자화상치고는 무척 초라하다. 이것은 화가의 ‘부재’에 대해 말하는 자화상이다. 현대의 작가들이 사진으로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 자아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몇 백 년 전의 화가 또한 미완성의, (그림으로) 존재하지만 (화가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 자화상을 남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