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으로 비웃는다. ‘아니, 내년이면 내 나이 100세고, 아내는 90세인데 어찌 가능하겠는가?’ 생각해보라. 하나님께서 오늘날 90세가 된 1여전도회, 1남선교회 성도 노부부에게 나타나셔서 내년 이맘때쯤 자녀를 낳을 것이라고 했다면 믿어지겠는가?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이렇게 반응한다.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18절). ‘아이고, 하나님! 이제 다 끝났습니다. 약속하시고 24년이나 기다리게 하시다니요. 무슨 계획이 그렇습니까? 자녀 낳을 때 다 지나고 오셔서 자녀를 주신다니요. 제가 이미 상속할 자녀까지 다 준비해 두었으니, 은혜를 주시려면 이 이스마엘이나 좀 잘되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더 느릴 때가 잦다. 그래서 많은 경우 우리를 지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를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기다림의 시간을 통과해야 한다. 하나님의 역사에는 성취보다 기다림이 더 중요하다. 이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 우리가 깨닫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내 힘과 계산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이 시간은 내 힘과 내 가능성은 온전히 죽고,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다시 사시는 시간이다(갈 2:20 참조). 이런 이유로 오늘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응답받는 게 점점 어려워진다. 왜? 기다리다가 너무 빨리 지치기 때문이다. 조금 기다리다 응답이 없으면 내가 먼저 나서서 어떻게든 대안을 찾으려 하다가 그냥 확 일을 저지르고 만다.”
22쪽 33. 하나님과 타협하려 하지 마라 중에서
“여기 보면 세 번이나 반복되는 표현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삶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사라를 돌보시고, ‘말씀하신대로 행하셔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때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빚어내는 능력이 있다. 그렇게 빚어낸 우리의 삶은, 삶 자체가 하나님의 메시지가 된다. 그동안 걸어왔던 아브라함과 사라의 삶을 보라.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에게 자손을 주고, 그 자손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고 온 열방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12:1-3). 아브라함 부부는 이 약속 후 25년 만에 자녀를 보았다. 정말 오래 기다렸다. 결혼한 지 2~3년이 지나도록 자녀가 없어도 정말 힘든데 자그마치 25년을 기다렸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이 25년은 하나님의 형벌같이 느껴질 수도 있다. 우리 같으면 ‘하나님, 참 잔인하세요. 어떻게 이러실 수 있어요?’ 하며 실망해서 토라지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본문의 말씀이 성취된 사건을 기점으로 지난 25년을 되돌아볼 때 하나님에게 이 25년은 아브라함의 삶 자체에 메시지를 새겨 넣는 시간이었다. 인내는 메시지를 새겨 넣는 도구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인내라는 도구를 들이대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이 인내의 시간이 힘들어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서 다른 땅으로 도망가기도 했고, 거짓말도 했고, 인위적으로 여종 하갈을 통하여 다른 아들을 낳기도 했다. 한때는 하나님의 약속을 비웃기도 하고 의심도 했다. 이 기간을 버티기 위해 아브라함과 사라는 참으로 많은 시행착오와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다. 그리고 25년의 시간이 지나자, 이 대가 지불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달리 결코 식언하지 않으시고,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임이 분명하게 드러났다(민 23:19 참조).”
103쪽 40. 깊은 울림은 삶의 메시지에서 온다 중에서
“에서가 사냥을 하고 와서 팥죽 냄새를 맡자, 얼마나 지치고 배고팠는지 무조건 달라고 한다.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30절). 여기 히브리 단어 ‘아예프’는 ‘너무 기진해서 기절할 지경’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영어성경은 ‘I am exhuasted!’라고 표현했다. 또 여기 ‘먹게 하라’는 동사는 그냥 얌전히 교양 있게 먹는 것이 아니라 게걸스럽게 삼켜서 먹는 것을 말한다. 꼭꼭 씹어 먹는 게 아니라 씹을 여유도 없이 마구 들이킨다. 에서는 지금 야곱에게 그 붉은 죽을 제발 좀 빨리 삼켜먹게 해달라고 거의 사정하다시피 부탁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 ‘에서’가 먹게 해달라고 말하는 것이 히브리 단어로 ‘아돔’, 즉 ‘붉은 것’이다. 에서가 나중에 붉은 족속, 에돔 족속의 선조가 되지 않는가? 붉은 에서가 붉은 아돔을 먹게 해달라고 한다. 여기 붉은 것은 물론 붉은 팥죽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에서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붉은 사냥고기를 간접적으로 의미하기도 한다. 즉 에서가 그토록 찾아다녔던 붉은 사냥고기를 찾지 못하고, 결국은 야곱이 준비한 붉은 팥죽에 미쳐 있는 것이다.”
211쪽 49.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중에서
“이것은 성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세상풍조 가운데서 내 인생에 끼인 거품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삶의 다양한 영역에 아주 은밀하게 끼인 거품까지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선하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순종하며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 거품은 종종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온다. ‘이것만 있으면 행복할 거야.’ ‘저것만 할 수 있으면 행복할 거야.’ 그러나 우리 인생에 행복의 이름으로 다가오는 것들을 경계하고 분별해야 한다. 왜? 우리는 성도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거룩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어그러지는 세상 가운데 행복으로가 아니라 거룩으로 부름받았다. 이 우선순위가 명확해야 하고, 우리 앞에 당면한 선택의 문제가 거룩의 문제인지 행복의 문제인지 잘 분별해야 한다. 많은 경우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선택한다. 그러나 행복을 따라가다 보면 거룩을 잃어버리고, 거룩을 잃어버리면 결국 행복도 잃어버린다. 반면 거룩을 향하여 가다 보면 거룩과 함께 세상이 알 수 없는 행복이 찾아온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게 더해지는 역사가 일어난다. 그리고 자신의 거룩을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흘러가는 복의 통로로 쓰임받는다. 이것을 배우기까지 우리는 종종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 본문에 등장하는 야곱의 인생도 그렇다. 하나님은 삼촌 라반을 통해 야곱의 거품을 빼는 과정을 겪게 하셨다. 이 과정을 통해 야곱의 생을 이전보다 더 거룩하게 만들어가셨다.”
332쪽 60. 하나님을 나의 자신감으로 삼으라 중에서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