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이 분단된 지 어느덧 70년이 넘었고 속절없이 몇 년이 또 흘렀다. 이별이 너무 길다. 남과 북을 셔틀 왕래할 때마다 가장 먼저 이산가족들이 눈에 걸렸다. 아마 그들은 전 세계 역사상 최초, 최대, 최악의 이데올로기 희생자들일 것이다. 그러나 절망적이지 않다.
올 봄에 남과 북의 지도자들이 만나 역사적인 4·27 판문점선언을 성사시켰다. 삼세번이다. 6·15선언과 10·4선언에 이은 세 번째 기회다. 하늘이 내려준 절호의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 이제는 민족공조를 이뤄 통일의 길목에 들어서야만 한다.
우리는 일본을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일컫는다. 하지만 아프리카보다 더 먼 곳이 있다. 우리가 흔히 ‘북한’이라고 부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그러나 나는 재미교포라는 신분으로 금단의 땅처럼 여겨지는 북녘땅을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열심히 다녔다.
나에게는 ‘분단 이후 최초’라는 수식어가 여럿 따라 다닌다. ‘분단 이후 최초로 남과 북의 국립묘지를 모두 탐방한 사람’, ‘분단 이후 북측의 여러 교회에서 가장 많이 설교한 사람’, ‘분단 이후 현존하는 북측 종교시설을 가장 많이 방문한 사람’, ‘분단 이후 가장 먼저 전파의 장벽을 깨고 서울로 카톡과 페이스북을 날린 사람’, ‘북측으로부터 전승기념일(정전협정일) 60주년 기념설교를 초청 받아 사전 원고 검열 없이 메시지를 전한 사람’ …
다시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본다. 과연 나는 저 북녘땅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거주하는 인구의 숫자보다 더 많은 폭탄이 투하되어 불바다가 된 평양 시민들의 처절한 고통을 나눠본 적이 있었던가? 폐허의 잿더미를 딛고 일어서려는 그들을 위해 삽 한 자루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전무후무한 대홍수와 가뭄, 냉해로 최악의 식량난이 발생했을 때 주린 배를 움켜쥐며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북녘 동포들을 위해 죽 한 그릇 정성스레 대접한 적이 있었던가?
전후 65년이 넘는 지금까지 각종 제재와 고립정책에도 굴하지 않고 인동초처럼 견뎌낸 북녘 동포들을 생각하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애잔한 통증이 밀려온다. 그들은 미국의 압박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비겁하거나 구차하지 않고 의연하게 살아왔다.
“최선생님, 미국이나 남조선에 가시면 그저 있는 사실 그대로만 알려주십시오.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습니다. 들은 대로 보신 대로만 적어주십시오.” 작별 인사를 나눌 때마다 북측 안내원들이 나에게 당부하는 말이었다.
사실 나는 북측 당국자들에게 골칫덩어리 그 자체였다. 방북자들에게 천편일률적으로 보여주는 일반적인 참관 코스를 따르기보다 내가 직접 코스를 짜는 다소 무모한 일정을 주장하곤 했기 때문이다. 나는 진실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속살을 들여다보고 싶었고, 인민들의 숨결을 느끼고 싶었다. 가고 싶은 곳에 가서 보이는 대로 보고, 느끼는 대로 느끼고 싶었다. 그런 까닭에 다소 무리한 요구사항을 관철하거나 일정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호텔 빈 방에서 속절없이 기다 려야 하는 외로움을 견뎌야 했으니, 이 책의 내용은 모두 그 무모함의 결과물이다.
북녘땅은 안내원 등이 동행하지 않은 채 방북자 단독으로는 아무
활동도 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나는 북녘의 방방곡곡을 누비며 볼 것, 못 볼 것 다 봤다. 통일의 상대인 북녘 사회를 이해하려면 상대의 입장과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내재적 접근이 필요하다. 나는 때로는 냉철한 기자의 눈빛으로, 때로는 의혹을 가득 품은 검사의 매서운 눈초리로, 때로는 자비한 목자의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했다. 방문 현장을 매번 영상으로 꼼꼼히 담고 메모해두었다가 객관적인 분석을 통해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려 하였다. 있는 사실 그대로를 통일지향적인 관점에서 민족의 앵글로 담아냈다고 자부한다.
이 책은 짧은 기간 안에 나름대로 분단의 벽을 허물고자 다양한 프로젝트를 세워 안간힘을 써온 이야기들이다. 나의 이런 행동이 자칫 상징적인 퍼포먼스처럼 비칠지도 모르겠다. 우리 앞에는 이념의 장벽, 종교의 장벽, 전파의 장벽, 휴전선 철조망 등 여러 장벽이 놓여 있다. 나의 글이 민족화해와 자주통일의 방향을 고민하는 작은 증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북녘땅을 밟는다는 것은 언제나 그 자체만으로도 알 수 없는 흥분과 기대감, 그리고 긴장감을 마주하게 된다. 누구라도 북녘땅을 쉽사리 찾는 날이 조만간 올 것이다. 북녘 사회를 올바로 대면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속의 돌덩이 같은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한다. 이 책은 가장 최근의 북녘 사회의 변화를 담고 있다. 편견 없이 북녘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싶다.
2018년 11월
최재영
--- 머리말 중에서
평양에서 보낸 카톡을 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처음에는 장난으로 알고 믿지 않았다. 실제 상황임을 깨달은 후에는 놀라서 어안이 벙벙해하였다. 내가 카톡 단답을 요청하자 그들 모두 간단한 답변을 날려주었다. 이로써 나는 평양 하늘 아래서 서울을 향해 마음껏 카톡과 페이스북 메시지를 날릴 수 있었다. 반대로 서울에서 보내준 카톡 답장을 아무런 문제없이 평양에서 즉시 받을 수 있었다. -33쪽
“아니 지금이 뭐, 휴가철도 아니고, 그렇다고 국가행사 기간이나 명절도 아닌데, 미국에서 뭐 하러 이렇게 많이들 방문했지? 나는 일부러 복잡한 기간을 피해서 방문한 건데.”
“…사실 이번에는 우리 측에서도 당황할 정도로 미국에서 유례없이 많은 분들이 방문하셨습니다. 대개 이 계절은 방문단이 뜸하고 한가한 시기인데…”
“아, 세상이 좋아지다 보니 북조선을 미국 교포들이 휴가지로 찾는 세상이 왔구먼.” -39쪽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박정희 대통령이 드라마에 등장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튿날 아침에 승합차량 안에서 그 이야기를 화제로 꺼냈다. 함께 탑승한 북측 일행들은 신이 나서 드라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등장하는 장면은 아주 오래전에 방영되었지만, 박대통령 역을 맡았던 배우 김윤홍의 명대사가 지금도 주민들에게 유행어로 회자된다고 한다.
“맞습네다. 거, 나카무라상 있잖습네까. 그 사람이 아주 우리 조선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입네다. 아주 잘생겼다구. 박정희 역을 얼마나 잘했는지 우리 장군님이 칭찬해주시면서 자동차도 선물했다고 하지 않습네까?” -43쪽
이북에는 ‘공식 환율’과 더불어 ‘실제 환율’이 있다는 것은 인지해야 한다. ‘공식 환율’이란 외국인 전용 ‘호구 환율’이다. ‘호구 환율’은 ‘실제 환율’에 비해 수십 배 정도 차이가 난다. 1달러 환율이 이북 화폐로 7,000원 정도인데, 호구 환율은 1달러에 130원인 경우가 있다. …외국인에 대한 이북 환율 적용제도와 2중가격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남한과 서방세계의 언론들은 마구잡이 오보를 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북의 환율 시스템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메뉴판에 적힌 가격표를 기계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음식값이 비싸기 때문에 일반 노동자나 주민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식당이나 커피점, 백화점에 갈 수 없는 그림의 떡”이라느니 “신흥 부자들과 특권층만 갈 수 있다”느니 하는 주장들을 신문이나 방송에서 근거도 없이 떠들어댄다. 이북에서 자국민들에게 적용하는 커피 한 잔의 실제 가격은 0.1달러 정도로 그리 부담스럽지 않다. -59쪽
선진국에서도 승마는 귀족 스포츠로 간주된다. 그렇기에 평양 한복판에서 승마를 즐길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미림승마구락부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승마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찾아와 이용할 수 있는 곳이다. 승마장이 개장한 지 6개월 만에 벌써 수만 명의 주민들이 이곳 승마장을 찾았다고 한다. -69쪽
“춘원 선생은 사후에도 참 파란만장하셨네요. 그럼 특설묘지 이전에는 춘원의 묘지가 어디에 있었나요?”
“그게 그러니까, 춘원은 원래 서울에 살 때 폐병을 앓고 살았단 말입니다. …전쟁이 시작되던 중에 우리 품에 안긴 춘원 선생을 우리 공화국 성원들이 따라다니면서 각별히 간호해줬는데도 별 차도가 없었습니다. 돌아가시던 날에도 상태가 위중해 긴급히 만포에 있는 인민병원으로 모시던 중이었는데, 차 안에서도 각혈을 많이 해서 피바다가 됐다고 합니다. 결국 전쟁이 시작된 지 넉 달 만인 1950년 10월 25일에 58세로 운명하셨지요. 전쟁 중이라 마땅한 장례 절차도 힘들고 해서 돌아가신 부근의 아늑한 자락에 그대로 매장을 해드렸단 말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길림성과 마주 보고 있는 자강도 만포군 만포읍 고개리 중턱이란 말입니다.” -121쪽
2012년의 평양과 2018년의 평양은 불과 5, 6년 만에 전혀 다른 도시가 되었다. 무엇보다 자동차와 택시가 급격히 늘어났다. 지금은 서양의 여느 도시들처럼 자동차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 역동적인 도시가 되었다. 평양 외곽에서 시내로 진입하는 도로는 차량들이 3개 차선을 꽉 채운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평양은 편도 3차선, 왕복은 6차선 도로가 많다. 그 넓은 도로가 주차장을 방불할 만큼 변해 차량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137쪽
이북은 접근이 전혀 달랐다. 전쟁고아들을 루마니아, 체코, 폴란드 같은 동유럽 국가나 러시아, 몽골 등지로 보내면서 교사들을 딸려 보낸 것이다. 루마니아에는 자체적으로 세운 학교에 3천 명의 전쟁고아와 인솔교사를 보냈으며, 전쟁 복구가 끝난 후에 위탁교육을 보낸 고아들을 되찾아왔다. 폴란드에도 2천 명의 전쟁고아들을 위탁교육 보냈다가 1959년에 이북으로 귀환시켰다. 1952년 몽골에 보낸 고아 200명은 7년 후 이북으로 모두 돌아갔다. -207쪽
벽돌 하나 제대로 남아 있지 않는 잿더미 속에서 이북교회는 회복할 수 없는 깊은 암흑으로 빠져들었다. 적어도 1953년부터 1972년까지는 그랬다. 이 기간은 전후 복구와 재정비를 위한 충전의 시기였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1972년부터 조금씩 경계심과 불신의 벽이 헐리며, 이북에서 가정교회와 처소교회들이 세워지고 있다. 1988년에는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이 연이어 설립되었다. 또한 목회자를 배출하는 평양신학원까지 세워졌다. -274쪽
장신부는 1987년 바티칸 대표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하였다. 장신부는 나흘밖에 되지 않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현존하는 북의 가톨릭 신자를 찾았다. 천신만고 끝에 다섯 명의 천주교 신자들과의 만남이 성사됐다. 본래 평양과 평안남북도 지역을 관할하는 평양교구에는 20여 개소의 본당이 있었지만, 해방 직후 6·25전쟁을 거치며 모두 사라졌다. 그런 황폐한 조건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킨 것에 경외감마저 들었던 장신부는 평양에서 돌아온 후 평양교구장을 겸하고 있던 김수환 추기경과 교황에게 이 같은 사실을 보고했다. …북에도 참된 가톨릭 신앙의 그루터기가 남아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접한 로마 교황청은 이듬해 4월 이들 신자 가운데 박덕수(마르코), 홍도숙(테레사) 부부를 바티칸으로 초청하게 된다. 이들은 부활절 대축일 전례에서 고해성사를 하고 영성체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박덕수와 홍도숙 부부는 북의 가톨릭 신자 가운데 전후 최초로 바티칸을 방문하는 기록을 세웠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직접 알현하였다. -310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