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좋아하는 예배당. 목사도 없고, 헌금도 없고, 전도도 없고, 그냥 기도만 있는 곳. 평화와 안식이 풍금처럼 깃든 곳.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닌데도 예수의 고독을 믿는 사람이므로 가끔은 그 열린 문으로 들어가 혼자 고요히 생각에 잠기곤 하였다. 그러면 나는 곧 그 첨탑 뒤로 십자가보다 맑게 흐르는 구름들에 대하여 다정하게 예배할 수 있었다. 구름들아, 안녕. 나도 지금 너희처럼 흘러가고 있는 중이란다. 우리 어느 하늘 아래서든 아주 사소한 눈빛으로 또 만나자.
그 예배당에 가고 싶다. 기도가 필요한 시절이다. 세상의 모든 그대들을 위한 기도.
---「예배당에 가고 싶다」중에서
오늘은 하루 종일 생일이었다. 하루 종일 생일이었으므로 하루 종일 미역국을 두 번 먹고, 오래 살려면 생일에 국수를 먹어줘야 한다고 누가 그러길래 읍내 나가서 짬뽕도 한 그릇 먹었다. 하루 종일 세 끼나 먹은 생일이니까 어머니도 하늘에서 조금은 흐뭇해하셨겠지.
생일이란 건 어머니도 아프고 나도 아픈 날이었을 텐데 세상에 아직 살아남은 내가 대표로 세 끼나 먹었으니 이만하면 참 괜찮은 생일을 보낸 거 맞다고 내가 나에게 힘주어 이야기해주는 생일 자정 무렵이다.
---「생일」중에서
나는 그토록 비를 좋아하면서도 정작 비에 관해 쓴 시가 거의 없다. 비 오는 날은 그냥 빗속에서 비를 살아버렸으므로 비를 다 탕진한 것이었다. 시에 데려다 쓸 비가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사랑에 대해서 시를 쓰는 사람은 정작으론 사랑을 살아낸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별에 대해서 시를 쓰는 사람은 정작으론 이별을 살아낸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시인이란 그리하여 모름지기 견디는 사람이다. 비도 견디고, 사랑도 견디고, 이별도 견디고, 슬픔도 견디고, 쓸쓸함도 견디고, 죽음도 견디고 견디고 견디어서 마침내 시의 별자리를 남기는 사람이다. 다 살아내지 않고 조금씩 시에게 양보하는 사람이다. 시한테 가서 일러바치는 사람이다…….
---「시인이란」 중에서
위로가 필요할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아침부터 울고 싶은 날, 나보다 먼저 슬픔이 일어나 눈시울을 깨우는 날, 마음 저쪽에서 고요히 들려오는 이름 하나 있다. 위로가 필요할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 만날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바라볼 수조차 없는 사람. 그러나 생각만으로도 마음 안에 분홍의 꽃밭이 일렁이는 사람.
이런 사람 이 생애에서 한 번쯤 만났으면 됐지. 한 번쯤 눈 맞췄으면 됐지.
아침부터 울고 싶은 날은 참 다행이구나. 지워진 이름조차 살아와 이마에 손을 얹는다. 그립다고, 그립다고 나에게 고백할 수 있는 날은 참 다행이구나. 따스한 음성으로 나를 불러다가 나 또한 나에게 푸르른 술 한잔을 건네야지. 아아, 사람아.
---「지워진 이름조차 살아와 손을 얹는다」중에서
방금 전에 양파 껍질 벗기다가 매워서 눈물이 조금 났는데, 눈물 난 김에 아까워서 그냥 울기로 했다. 이왕 우는 거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울었다. 그러자 울기 전까진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외롭고 측은한 사람이 나였는데, 울고 나니까 홀연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슬프고 외롭고 측은하게 보인다. 갑자기 아무거나 다 용서하고 싶어진다. 가끔은 양파 껍질도 벗기면서 살아야 사람이 되는 거다.
---「이왕 우는 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