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국사와 국어 교과서에 한해서는 국정교과서 체제이기 때문에 모든 학생들은 '북벌=송시열'이라는 조작된 도식을 그대로 외워야만 하는 것이다. 실제적 북벌론자 윤휴가 죽은 후 송시열의 당인 노론은 윤휴가 아닌 송시열을 북벌론자로 추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이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정권을 잡음에 따라, 그리고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에도 상당한 세력을 온존함에 따라 '송시열=북벌'이라는 진실과 동떨어진 논리를 반복적으로 주입시킨 것이고, 여기에 일부 역사학자들이 놀아남에 따라 오늘날 국사교과서에까지 실린 '역사적 진실'이 된 것이다. 이를 두고 역사가가 선택해 기술하는 사실이 역사가 된다는 서양의 역사가 카(E.H.Carr)의 말이 실현된 것이라고 한다면 합당한 해석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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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생산과 상업의 발달, 그리고 수공업과 화폐 경제의 발달은 신분제를 변화시켰다. 농민들은 전주와 전호, 그리고 임금노동자로 분화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전주-전호 사이의 대립을 격화시켜 항조(抗租)운동이 일어나게 했으며, 때로는 민란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부농으로 성장한 일부 양민들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노비들은 양반이나 양인으로 신분 성장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공명첩(空名帖)·납속책(納粟策) 등을 통해 양반과 양인의 신분을 획득했으며, 이 외에도 박지원의 양반전에 나오는 족보 매매 등으로 호적을 고쳐 조상을 바꾸거나 유학(幼學)·진사(進士)를 사칭하기도 했다.
서얼(庶孼)이나 중인들도 소통(疏通) 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들은 무관(武官)을 중심으로 관계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부모 양쪽 중 어느 한쪽이 천인이면 천인이 되던 양천제(兩賤制)가 예송논쟁의 와중인 현종 10년에 어머니의 신분에 따르는 종모법(從母法)으로 바뀐 것도 신분제 변화의 하나였다.
양반들도 이런 변화의 물결에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일부 양반들은 거대한 부를 축적하면서 벌열(閥閱)이 되어갔으나 다른 양반들은 몰락해 일반 농민들과 비슷한 처지에 떨어졌다. 농민 사회가 내부 분화한 것처럼 양반 사회도 내부 분화한 것이다. 이 모두가 급변하는 사회·경제적 변화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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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동지에게 받은 무수한 찬사와 적에게 받은 무수한 저주는 내게 그 시대를 바라보고 평가하게 해 주는 자료이자, 그가 우리 사회에 미치고 있는 현재의 영향을 평가하게 해 주는 자료일 뿐이다. 그는 한 시대를 이끈 인물인 만큼 그 시대에 미친 그의 영향력의 긍,부정은 엄격히 평가받아야 한다. 또한 현 시대는 앞 시대를 이어받아 이루어졌으므로 그가 현재에 미치고 있는 영향력의 긍,부정도 냉정하게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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