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등학교 진학을 못하고 3년을 방황했다.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을 땅도 넉넉지 않았고, 집을 떠나기에도 나는 어린 데가 있었다. 하는 수없이 공사판을 돌며 고된 일을 했고, 그 노동의 대가로 술을 배우고 담배를 배우고 싸움을 배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절망의 날들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꽉 막힌 세월이었다. 술과 싸움 외에 정말이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병석에 누운 어머니마저 미울 때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밤, 나는 더 이상 가망 없는 내가 싫어 한정도 없이 술을 들이켰다.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긴 밀밭 길을 걸었다. 휘청대는 나를 바르게 세워주는 이 하나 없는, 그 길을 걷던 나는 그때 십 대의 중반을 넘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서둘러 오던 누군가가 내 앞에 다가와 섰다.
“남들 부끄럽지도 않느냐? 대체 왜 이러느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내 앞을 딱 가로막아 서 있었다.
“사는 게 희망이 없어요!”
그 말을 하며 나는 주저앉아 울었다.
정말이지 그때 내게는 아무 희망도 없었다. 내 울음을 지켜보던 아버지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여셨다.
“우선 네 어미부터 고치고 보자.”
아버진들 내 심정을 모를 리 없었다.
“남들 다 죽는대도 이 아비에겐 보리씨 한 톨만 한 희망이 그래도 있다. 너도 끈을 놓지 말아라.”
아버지는 쓰러진 나를 껴들고 걸으며 나직이 타이르셨다.
아버지만은 어머니의 힘없는 목숨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있었다.
나는 울음을 그치고 그해 겨울, 진학 시험을 치렀다. 상업고등학교였다. 아버지가 들려주신 ‘보리씨 한 톨만 한 희망’의 말씀이 없었다면 나는 뒷날 어떻게 되었을까. --- 「보리씨 희망」 중에서
우편물을 부치러 우체국에 들렀다가 느닷없이 그 길로 이천행 버스에 올랐다.
16년 전이다. 이천에서도 시내버스로 30분은 더 가는 시골 학교에 잠시 머무른 적이 있었다. 그곳이 가끔은 그리웠다. 아마 쭉 근무하던 강원도에서 경기도로 자리를 옮긴 첫 학교였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학교 주변이 전통적인 한가한 농가 풍경이었다.
그러나 찾아간 그곳은 이미 기억 속의 마을이 아니었다. 아파트도 섰고, 면사무소는 잔뜩 위용을 갖춘 3층 빌딩으로 바뀌어 있었다. 예전에 즐겨 가던 대포집과 늘 점심을 먹던 식당을 찾았지만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잠시 근무하던 학교도 많이 변해 있었다.
나는 그 예전, 체육 시간이면 아이들과 함께 곧잘 가던 개울가를 찾았다. 개울둑의 느티나무만이 홀로 나를 반겼다. 예전 같으면 아이들로 붐볐을 개울도 싱겁게 누워 있었다.
한참을 서서 오래된 추억에 잠겨 있을 때였다.
불현 건너편 개울둑에 나타난, 발가벗은 어린아이 하나가 쫓기듯 개울물에 덤벼들었다. 그 뒤를 따라 바구니를 낀 아이의 엄마임 즉한, 차양이 긴 모자를 쓴 여인이 아이를 쫓아 개울물에 들어섰다. 여인은 아이의 손목을 잡아 쥐고 얼굴이며 등허리며 다리를 씻겼다. 그러더니 툴툴대는 아이를 데리고 이쪽 개울둑으로 올라왔다. 여인은 아이를 달래며 내 곁을 조용히 지나갔다. 옥수수와 가지를 따 담은 바구니를 힘겹게 옆구리에 낀 채로.
나는 내 곁을 지나가는 엄마와 아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근데 몇 걸음을 가던 여인이 모자를 벗은 채 고개를 갸웃하며 되돌아 왔다.
여인이 내 앞에 와 섰다.
"저, 혹시……."
그렇게 말하는 여인의 입모습이 왠지 낯익었다.
“옥자라고 아세요? 6학년 때.”
여인은 부끄러운 듯 자신을 소개했다.
맞았다. 그러고 보니 대숲집 옥자였다.
"선생님, 한눈에 몰라 뵈어 미안해요."
그 옥자가 지난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선생님께서는 제가 소리 내어 책을 읽고 나면 늘 그러셨지요. 목소리와 입모습이 참 예쁘다고. 그러면서 절 보고 뭐라 하셨는지 아세요? 아나운서감이라고 하셨지요.”
말을 마치고 옥자가 피식 웃었다.
서른이 넘은, 시골 아낙이 다 된 자신이 부끄럽다는 웃음 같았다.
"요즘도 뉴스를 볼 때면 가끔 선생님 생각을 해요."
논밭 사이 길을 걸어 마을로 돌아오면서 이번에는 내가 부끄러웠다. 당당히 농부의 아내가 되지 못하게 한 게 내 책임 같았다. 그동안 옥자는 어쩌면 현실을 살면서 또한 구름 위의 세상을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내가 말을 아무렇게나 했구나."
내 말에 옥자가 야무지게 대답했다.
"지금은 농사일을 하겠지만 다음에는 꼭 할 거예요."
"다음이라니 언제?"
나는 놀란 눈으로 물었다.
"다시 태어나면요."
그가 당돌하게 대답했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어금니를 꾹 물었다.
사람은 무슨 힘으로 사는가.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내내 그 생각을 했다. --- 「다시 태어난다면」 중에서
방학이라 딸아이가 집에 돌아와 있다. 외국에 나가 대학을 다니는 딸아이는 방학이어도 제 시간이 있어 늘 바쁘다. 함께 아침을 먹는 횟수도 적고, 함께 티브이를 보는 시간도 흔하지 않다. 한번 외출을 하면 뭔 일이 그리 많은지 늦어서야 돌아오기 일쑤다. 그래도 가끔 함께 식사를 할 때면 나를 챙긴다.
“입가에 밥풀 떼어요.”
“맛없어도 엄마를 생각해 맛있게 먹고.”
“숭늉 마실 땐 입 안 훔치는 소리는 내지 말아요.”
그리고 조금씩 술을 줄이라거나, 어느 때에 꽃을 사 들고 들어오는 게 좋은지를 귀띔하기도 한다. 딸아이는 늘 내 뒷자리에 있었다. 그가 어렸고 내가 그의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를 했으니까.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내 앞에 나서서 내 흠을 밉지 않게 고쳐 주곤 한다.
“함께 산에 가지 않으련?”
어느 날, 딸아이에게 짬이 난 걸 알고 나는 물었다.
가끔 산을 오르다 보면 아들과 함께 산을 오르는 아버지들을 만나곤 한다. 늘 그랬던 건 아니지만 나는 가끔 그들이 부러웠다.
“좋아요.”
딸아이가 흔쾌히 내 부탁을 받아 줬다.
산이라 봐야 동네 산이다. 산 입새에 들어서면 길이 좁아진다. 딸아이가 내 앞에 섰다. 자연스럽게 나는 딸아이 뒤에 서서 산을 올랐다. 앞서 가는 딸아이의 키가 시야를 막고, 젊은 그의 걸음이 내게는 맞지 않다. 그런데도 딸아이를 앞에 세우고 산을 오르는 일이 싫지 않았다. 나는 여태껏 가족을 위해 늘 앞에 서서 여기까지 왔다. 전세방 하나를 얻어 옮길 때도, 명절에 고향을 내려갈 때도 싫어하는 가족을 데려고 앞장 서 갔다. 그러느라 온갖 불평을 들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의무감에 앞이라는 자리를 지키면서 살아왔다.
산을 오르다 보면 몇 번의 갈림길이 나온다. 샘물터로 가는 계단 길과 숲으로 들어가는 호젓한 소로小路. 나는 늘 이쯤에서 번잡하지 않은 소로를 택했다.
“어떤 길로 가고 싶어요?”
갈림길 앞에서 딸아이가 내게 물었다.
“네가 좋아하는 길로 가자.”
나는 내 방식의 길을 그 순간 버렸다. 딸아이는 젊은이답게 계단으로 만들어진 쭉 벋은 언덕길을 택했다. 내가 원하는 길은 아니지만 서슴없이 딸아이의 길을 따랐다. 그래서 나는 또 그것이 몹시 기뻤다.
이 나이에 나의 길을 딸아이에게 맡기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딸아이의 뒤를 따르는 동안 나는 내 방식의 길을 버렸다. 그것이 비록 이번 한순간의 양보라 할지라도 그래서 기쁘고 뿌듯했다. 내가 나의 길을 고집한다 해도 세상의 모든 순서가 그렇듯 언젠가 나는 내가 가는 길을 누군가에게 비켜 줘야 한다. 그것이 나의 딸아이든 얼굴을 모르는 다음 세대이든. 뒤에 선다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지 이제는 거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자식을 앞세우고 산을 오르는 이들이 왜 부러웠는지 오늘에야 알겠다. 삶의 이치를 천천히 받아들이는 기쁨 때문이 아닌가 싶다. --- 「뒤에 서는 기쁨」 중에서
여름방학이 끝나면 아이들 키가 한 뼘씩 큰다. 방학 한 달을 쉬는 동안 어깨가 벌어지고, 가슴이 넓어진다. 몸만 크는 게 아니라 생각도 깊어진다.
엊그제 우리 반 32명과 함께 봉사 활동을 하러 남산엘 갔다. 중학교 1학년인데도 아이들 뒷모습이 의젓하고 든든해 보인다. 나이로 치면 열세 살 소년들이다. 그러나 열세 살은 덩치가 커도 속일 수 없이 열세 살인가 보다. 길옆 난간에 올라가 가랑이를 벌리고 쭈르르 미끄럼을 탄다. 아이스크림 장수를 보면 그걸 사달라고 조른다. 미운 데가 없는 장난기 많은 나이이다.
그런 아이들 중에서도 내게 슬며시 다가온 녀석이 있었다. 진재다.
“선생님, 혹시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
볼살이 통통한 진재가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불쑥 물었다.
“진재는 생각 좀 해 봤니?”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되물었다.
“인생이란 식탁 위에 오르는 빵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으음, 제가 생각하기엔 말입니다.”
진재의 눈빛이 빛났다.
“부끄러움을 사랑하는 일 같아요.”
놀랍게도 그랬다.
“그래? 그게 무슨 뜻이지?”
열세 살 진재가 정말 대견스러웠다.
“하루에 다섯 번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그날 하루를 헛되이 살았다는 말 아시지요?”
그러며 씨익 웃었다.
진재는 요즘 인생에 관한 금언집을 주로 읽는다고 했다.
그 말에 불현 나의 소년 시절이 떠올랐다. 인생 공부에 관한 나의 첫 시작도 그랬다. 철학서적을 뒤지거나 도덕책 같은 러시아 소설을 읽으며 시작한 것이 아니다. 주로 인생을 정의해 놓은 금언집에서 시작했다.
“인생은 불확실한 항해다. 셰익스피어.” “인생은 한권의 책과 같다. 장 파울.” “그대는 인생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말게. 인생은 시간으로 되어 있으니까. 플랭클린.”
이런 식으로 인생을 외었다. 장 파울이 누군지, 플랭클린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열세 살의 나이는 인생을 배우는 초보자다. 초보자는 서툰 편린 같은 명언들을 사모한다. 그러면서 인생 속으로 빠져든다.
“언제부터 인생을 생각했지?”
나는 진재에게 물었다. 진재가 한참 숙고를 하더니, 일주일쯤 되었다고 했다. 웃음이 나왔지만 그의 진지한 ‘인생’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근데 말이에요, 선생님.”
진재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촌 누나한테 ‘인생이란 부끄러움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말했더니 글쎄 절 보고 노땅이라지 뭐예요.”
‘노땅’이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애늙은이’라 했다. 그 말에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웃었다. 진재도 따라 웃었다. 남산의 깊어 가는 숲도 따라 웃었다.
열세 살 진재에게 인생을 생각할 가을이 온 게 틀림없다.
--- 「열세 살 인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