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물학을 배우는 동안 풍부한 진화의 증거들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화석 자체가 창조나 진화 어느 한쪽을 증명해 주지 않을 수도 있다. 일단 공부를 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고생물학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화석 생물들을 분류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각 생물 종마다 독특한 이름을 붙이는데, 이를 학명이라고 한다. 해당 생물이 어느 속, 어느 종에 속하는지가 표현된다. 이러한 분류를 위해서는 화석의 형태 파악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고생물학 수업 대부분은 화석 생물의 해부도를 비교하는 것이다. 고생물학은 정말 인내심이 많이 필요한 과목이었다. 생물의 외형과 내부 구조를 세밀하게 그리면서 각 기관의 기능들도 꼼꼼히 외워야 했다. 조금만 모양이 달라져도 생물의 역사를 해석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많은 삼엽충 샘플을 배우는 과정에서 놀랍게도 삼엽충의 진화 증거를 본 적이 없었다. 분명 교수님은 진화의 역사를 보여 준다고 확신하면서 가르쳤겠지만 모든 기관이 완벽하게 갖춰진 삼엽충들만 보았을 뿐, 그것이 어떤 조상으로부터 나왔는지, 혹은 점진적으로 어떤 다른 생물로 변해 가는지를 보여 주는 화석은 전혀 없었다.
---「지구 나이는 정말 46억 년일까?」중에서
2002년, 나는 경기도 지구과학 교사로 임용되었다. 가르치는 일은 적성에도 맞아서 학교생활이 즐거웠다.
그런데 이따금 잠재되어 있던 ‘창조와 진화’ 문제 때문에 짐을 느끼곤 했다. 나는 해마다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와 같은 지질시대 역사를 ‘지구의 역사’ 단원에서 가르쳐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은 국가교육과정을 운영하기 때문에 교사 개인에게 교과 내용 편성권이 없다. 그러다 보니 모든 학교에서 각 학년마다 거의 같은 내용의 수업을 받는다. 이러한 정책이 고른 학력 수준을 유지한다는 측면에서는 좋은 기능을 하지만, 논쟁적인 내용이나 다양성 추구에서는 한계가 생긴다.
나는 우리 시대가 진화론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게 된 것이 엄밀히 과학적 사실 덕분이라기보다, 과학이라는 학문을 향한 보편적 믿음 덕분이라고 여긴다. 문제는 ‘사실이냐, 가정이냐’ ‘객관이냐, 믿음이냐’ 같은 철학적 사고에 미숙한 아이들에게 진화론을 과학적 진실로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진화론이 온 국민의 상식이 되었나?」중에서
크리스천 과학자들과 교계 유명한 분들, 심지어 신학자들도 일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경은 종교적인 의미로만 해석되어야 하고, 자연에 대해서는 과학자들의 견해를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즉 그들은 진화론도 받아들이고 창조주 하나님도 믿는다. 다만, 창세기의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을 뿐이다.
나는 이 일련의 변화를 보면서, 이제 ‘창조냐, 진화냐’의 과학적 논쟁을 넘어 새로운 국면이 되었음을 직감했다. 세상에서 진화론 패러다임이 보편적인 것이 되다 보니 신학조차 진화론이 과학적 사실이라는 전제 위에 성경을 보는 것을 당연시하는 흐름이 생겨 버린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교회를 향해 ‘올바른 창조 신앙’을 진화론 위에 세울 것을 요구하고 있다.
‘성경’이 기독교 신앙의 근거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한 번은 진지하게 창세기와 충돌하며 이 시대를 덮고 있는 진화론이 과학적 사실인지, 그래서 우리가 창조 기사를 그대로 믿는 것이 정말로 시대착오적인지 검토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 문제를 미뤄 둔다면,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는가’에 대한 답변에 심각한 마비가 올 수 있다.
---「성경은 구원의 책일뿐 과학책은 아닌 건가?」중에서
진화론자의 추론과 창조론자의 추론의 차이는 ‘과학적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관찰한 사실을 상상력, 믿음, 선지식, 훈련, 경험, 기대 등의 주관적 요소와 문화적 맥락이 개입된 추론으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있다. 그리고 이 주관적이고 문화적인 요소들 가장 아래에는 양립할 수 없는 전제가 놓여 있다. 한쪽은 자연계의 역사를 해석하는 데 있어 오직 물질적인 우주가 전부이고 모든 것의 원인이라는 ‘유물론적 전제’만을 받아들인다. 다른 한쪽은 우주가 지성과 인격을 가진 창조주에 의해 목적을 가지고 설계되었으며 피조물들은 창조주에게 의존적인 존재라는 ‘성경적 전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분명 기원 과학은 추론 의존적이고, 추론은 관점 의존적이다. 어떤 관점에 기반한 가정과 전제가 과학이냐 아니냐를 가리는 기준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철학적으로 편향된 사고이다. 양쪽 진영은 오히려 어떠한 설명이 더 타당한지, 관찰 사실들에 무엇이 더 잘 부합하는지, 그리고 어떤 해석에 논리적 오류가 적은지 끊임없이 물어야 할 것이다. 창조론과 진화론, 둘 다 현대 과학의 본성 이해에 따르면, 관찰 가능한 현상을 기반으로 해서 관찰한 적이 없는 먼 과거에 대해 추론하는 믿음에 기반한 해석 체계이다. 이제, 창조론을 사이비 과학이라고 매도하기 전에, 어느 쪽이 합당한 믿음인지, 그리고 무엇이 더 과학적 사실들에 부합하는 해석인지를 묻기 바란다.
---「창조론과 진화론, 둘 다 과학인가?」중에서
복음의 파괴는 창세기 1-3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데서 시작됐다. 우주와 지구가 대폭발의 산물인데, 어떻게 창세기가 사실일 수 있는가. 또 생물의 진화가 사실인데 어떻게 아담과 하와가 우리의 조상일 수 있는가. 하지만 유신진화론자들은 창세기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하나님을 믿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자신들도 거듭난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진화론을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창세기를 역사가 아닌, 비유적, 신화적, 문학적으로 해석하라고 권면한다.
그러나 성경의 복음은 옷 수선하듯이 여기 조금, 저기 조금 자르고 꿰매서 모양새를 갖출 수 없다. 창조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초림뿐 아니라 재림까지 일점일획도 변경되지 않는 말씀으로 완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에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을 부활의 몸으로 살리신다고 약속하고 있다. 그 마지막 때에 하나님은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두겠다고 하셨다(고전 15:23-25). 그리스도가 마지막 심판을 행하시는 그때, 모든 원수 중에서 맨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가 바로 ‘죽음’이다(고전 15:26). 죽음까지 멸망해야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회복은 처음의 완전한 상태로 돌이키는 것이고, 더 나아가 죄가 없는 영광의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모든 것이 거룩하고 영화롭게 회복된 하나님나라에서 사망은 공존할 수가 없다.
복음은 진리가 아닌 것과 조화되지 않으며, 조화하려고 할수록 모순만 커진다. 창세기 1장에 진화론을 용납하면, 하나님 자신이 죽음과 멸종을 스스로 창조하셨다는 모순을 불러일으키며, 생명의 법과 사망의 법이 함께하는 무법천지가 된다. 수십억 년 동안 반복된 죽음과 멸종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출현시킨 과정이 된다. 그러면, 아담에게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고 말씀하실 때, 죽음은 이미 창조 때부터 있었던 것이므로 선한 것이라고 해야 할까?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이 아담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라고 하신 것은 저주인가, 복인가? 정말 처참한 왜곡이 아닐 수 없다.
---「복음과 진화론은 한 길을 갈 수 없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