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로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말을 독일어로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외국어로 표현한다고 해도 자살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우울, 사건, 스스로, 죽음 등 많은 단어를 찾아 헤맸지만, 나는 결국 사전에서 Verlust(분실, 상실, 손실, 잃음), Verwandlung(변화, 변경, 변신, 전환), Verschwinden(소멸, 사라지다) 사이를 계속해서 배회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나의 엄마는 분실했고, 상실했고, 손실했고, 잃었으며, 변화했고, 변경했고, 변신했고, 전환했으며, 소멸했고, 사라졌다. 그리고 그에 따라 나는 분실했고, 상실했고, 손실했고, 잃었으며, 변화했고, 변경했고, 변신했고, 전환했으며, 소멸했고, 사라져 가는 중이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끝내 내가 말하게 되는 건 “엄마는 죽었고, 그냥 그렇게 되었어”였다.
--- p.120
상대를 마음 깊이 보듬어 주다가 편안하게 보내 주는 일. 가볍고 아름다운 이별. 마음을 건강하게 정리하는 일. 이렇게 쉽고 자연스러운 일을 나는 왜 예전에는 하지 못했을까? 예상한 죽음과 예상하지 못한 죽음은, 죽음을 마주한 순간부터 이별 방식까지 너무 다르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누군가 나에게 가르쳐줬더라면, 나는 좀 더 일찍 엄마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을까?
--- p.215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써야 할까? 어떻게 쓸 수 있을까? 내가 경험하고, 겪어 왔던 시간에 대해 쓰는 일이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왜 이 글을 써야만 했을까? 심장이 굳고, 마음이 부서져서 목소리를 잃은 사람이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쓰려고 할 때, 깊게 응어리진 과거를 하나씩 드러내 바라보는 일이 시작된다. 적절한 표현을 위해 글자의 획을 모아 자음과 모음을 만든다. 슬픔을 표현할 단어를 찾고, 나를 아프게 하고 때론 위로해 주는 문장을 하나씩 적어 나간다. 다시 심장이 굳을까 봐, 다시 마음이 부서질까 봐, 간신히 끌어모은 목소리마저 다시 잃어버릴까 봐 나는 글 쓰는 일을 오래 망설였다.
--- p.275
유가족이란 남은 사람들. 남아 버린 사람들. 남겨졌지만 남겨지지 않은 사람들.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뒤바뀌고 뒤섞이는 여러 감정들을 품어 내야 하는 사람들. 무너진 삶의 의미를 다시 세워 나가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의심과 재정립을 반복하면서 흔들리는 삶의 근원을 붙들어야 하는 사람들. 떠나간 사람을 제외하고는 계속 변해 가는 시공간 속에 놓여 그저 살아가는 듯 보일 뿐이지만, 내면에서는 끊임없이 치열하고 고단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
--- p.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