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피어난 꽃들만/황홀히 들여다보지 마라./일부는 시들어 무너지고/떨어져 볼품도 없어//누구도 지나치는 서글픈 시절/따가운 태양과 하늘, 몰아치는 태풍에/마음을 빼앗기는 뜨거운 계절을 견뎌/지금에 도달했노라.//나, 한때는 앳된 씨앗으로/거친 대지를 뚫고 나온 인고의 성년/이 계절에 그래도 갖춘 건/수만 가지 색과 열매//그리고 소곤소곤 지난한 이야기/내어놓을 나의 수확이/성에 안 차 부족하더라도/우리 산 시절/되돌아갈 수도, 멈출 수도 없으며/가져가야 할 아무것도 없음에/그냥, 열심히 살았구나.
--- p.14 「지는 꽃들에 대한 자세」 중에서
그대! 오늘 숨 잘 쉬었소?//그대의 날숨과/누군가의 들숨이 만나는/어느 지점에서/우리는 살아갈 힘을/얻는다던데//누구는 맥주라 하며 마시고,/누구는 왕관이라 하는/코로나로/숨이 안 쉬어졌다고 하네….//그대! 오늘 잘 지냈소?/한 사람 건너 멀리 멀리서/한 사람이 안부를 묻소.
--- p.26 「Covid-19」 중에서
우리 처음처럼 만났던/그날이 언제였더라.//누구는 저 물가의 버드나무처럼/배경이 되고//그대는 저 여인네처럼/주인공이었던 그날들처럼//이 그림을 자세히 봐줘./춘천에서 밤눈꽃이 흩날리던 하얀 겨울이//서울로 내달리던 길가는/아련한 노랑 봄이 오더군.//세상에서 도처에서 만나고 오가던/수많은 봄과 사람 사이에서//사랑한다. 오랜 벗들이여,/이젠 이해한다.
--- p.28 「처음처럼」 중에서
결혼은 환상 속의 이인삼각 게임이다./다른 색과 언어를 가진 연습 없는 페어댄스다./두 명이 일심동체를 외치며 야심 차게 출발하지만/맞출 수 없는 춤사위다./천방지축인 한 명에 반해/중구난방인 주위 환경이 더하고/좌충우돌, 우왕좌왕, 갈팡질팡한 상황들/또 다른 언어를 가진 아이가 끼어드는/방향도 박자도 못 맞추는 엉망진창,/뒤뚱뒤뚱한 막춤이 결승점을/향해 가속도를 내고 있다.
--- p.32 「어느 날 문득」 중에서
대보름/달과 함께 온 아가//온 꿈 담아 맑게 씻어/인큐베이터에 넣고/들여다본다//누구에겐 사랑/누구에겐 희망, 미래//나에게 조그마한 넌/밤 지새운 기대와 인생의 위로//너의 영혼은/순수와 순백의 상상력//나의 시간은 겨울날 오후/5시 반 즈음//어느 가슴엔들 꽃피고 설렌/
새벽이 없었을까//그 많은 설움들이 오고 가는 순간에/잠시 잠깐 스쳤구나/귀여운 나의 이방인
--- p.34 「대보름 아기」 중에서
나의 껍질은 달팽이처럼//마음이 오그라들어/쉽지 않은 날엔/들어가 버리자! 숨어 버리자!//순풍이 불고, 물결이 따뜻해지고/달팽이 속살처럼 여려진 마음을/한번에 쭉 빨아올리려는 세상에서//돌 밑에 붙어 기다리다가/달팽이 걸음만큼만 기어가야지…/아니, 물결 속에 모래 속에 쓸려가야지….
--- p.40 「달팽이」 중에서
수야, 연아/우리의 사월은/영산홍 피어 붉어가고/달과 별, 구름이 지나간다.//움직이는 것은 정작 자유롭지 못하고/움직일 수 없는 것들은/오직 자유인/산등성이는/밤도 낮같이/푸르고 훤하다.//우리 한세상 꿈이라면 어땠을까!/다시 멋지게 꾸어 볼까!/오늘 바람은 약풍, 구름 낀 하늘이다.//수야, 연아 비가 오네./이 비는 가랑비/밤비 내린 그 산에/다시 바람이 불면//청이끼 낀 바위 틈새에도/어린싹 청록으로 물들며/봄이 간다.
--- p.44 「안산에서」 중에서
살다가/죽고서야 헤어질 우린/어떤 인연이냐?//가슴에 묻어둔 시답잖은 기억은/그냥 보내버리고/곁 바람에 흘려보내고//새벽 4시의 초침처럼 버려질/꿈결 속의 시간까지/너와 나의 아까운 시간/참 많이 지났더라.//우리, 한잔하고/아쉬운 듯 헤어져/인적 드문 밤길을/뚜벅뚜벅 걸어본다.//꽃피고, 밤비 오고/눈 내리는 계절 건너/너희와 함께라서/그럭저럭 지낼 만했다.
--- p.52 「우리」 중에서
그대에게 나 못다 한 말이 있네./슬프다느니, 외롭다느니/이런 말이 아니어도//오늘, 강 건너, 하늘 너머/어스름 깔리는 강가에서/그냥 서럽구나.//젊음과 이상에 고삐를 내가 채웠어./사랑이란 이름으로 돈을 벌어오라 하고/중요한 너의 시간을 모두 허비하게 했지.//다 쓰게 만들어 병상에 뉘어 놓고/내가 물었어. 죽는 거 무서우냐고/아니야, 이렇게 아픈 것이 불지옥이야.//그렇구나, 사는 것이 지옥이 된 사람을/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던 날에도/그렇게 아팠던 사람을 화장하던 날에도/영원히 못 나올 석관에 묻어 놓고/그렇게 쉽게 돌아왔구나.//내게 남겨진 생의 고뇌는/시간이 지나고 또 지나도/따뜻했던 시절의 기억만이 남아서일 것이고/그리도 짧을 생애에/다해 주지 못한 나의 부족함을 끝없이 되뇔 남은 생애겠지.//그대 없음에/우리도 없음을 깨닫는 잔인한 이별이구나./그대에게 해주지 못한 말이 있었네/모든 게 미안하구나.
--- p.62 「강가에서」 중에서
비 내리는 화요일이다/한강을 매일 보는 낙(樂)을 얻었다.//이런 날은 하늘빛 물빛 서로 닿아 회색빛/나름 좋다.//만년 수십 년을 수련에 바친 모네의 색감처럼/아득한 주변의 가을빛//사람에게도 특유의 색감과 느낌이 있다/우린, 서로 어떤 색감을 주고받은 사람이었을까.//대답하지 마라/너무 진실이어서, 혹 뻔한 거짓을 들을까 두렵다.//이 빗속에서/나처럼 먹이 활동하며//9마리의 새들이 횡단하는/한강은 힘겨워서 잿빛
--- p.72 「화요일엔 비가」 중에서
죽은 자들이 날아다니고/산 자는 우정을 버리는 이 강가엔//친구였다면/그대가 내 친구였다면/어쩔 수 없는 일/어쩔 수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나?//그 밤/나의 우주는 폭발했고/나는 출구도 없는 구멍 속으로 빨려들어 갔어/시간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갈수록/더욱 느려졌지.//나의 별과 너의 별 사이에 펼쳐진 공간들은/강가의 표면처럼 물결 모양으로/출렁 흔들렸었어.//살다 보면, 할 수 없는 일/있을 수 없는 일, 믿기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아는 이는 모두 아는데//진실은 누구도 모르는 일이라고/정의도 불의도 시비도 그 자리에 있지 아니한/사람은 누구도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라고 말한다면//그것을 말한 선인(先人)이 있다면/우리의 참과 의는 어디로 간 것인가/어쩔 것인가/지난 우리의 세월은 암흑, 모두 감춰진 세상/침묵하는 세상뿐이었을 거다.//의사는 과학을 탐구하는 사람/사람들의 병을 치료하는 사람/사람의 마음을 바라봐야 하는 사람/순간적인 판단력과 빠른 처치를 해야 하는 사람/단지 이것뿐인가?//진실이 필요한 자리에/암묵적인 침묵과 강요는/자유에 대한 유린이자 퇴보다.//그날/우리가 같이 나눈 시공간에서/친구였다면, 네가 진실을 말해다오./내가 할 수 없는 처지이니/나의 진실을 찾아 헤매는 나의 부모님에게….
--- p.96 「사라진 두 친구에게 바침」 중에서
한 사람의 자궁을 벌려/어린 생명을 들어 올리는 것이/나의 일//그래서?/좁디좁은 골반 뼈와/살과 살을 통과하는/이 여린 생명을//초조와 불안으로 지켜봐야 하는 것이/나의 밥벌이고, 운명//그래서!/붉디붉은 피 냄새에/한숨, 들숨이 폐포를 통하고서야/심방과 좌심실로 이어져 대동맥으로 박동치는/몽롱한 새벽에서야 끝나는 이것이//미칠 듯이 사랑한 어느 날/그들이 어떻게 만났고/어떻게 사랑했는지, 둘만 알던 사랑이/모두가 아는 고리로 이어지는/영원한 연결, 사슬이 되어 버렸다.//그래./이젠 되었다/그것으로 일부가 되어 버렸다.
--- p.104 「한가위에 응급」 중에서
멍멍이와 멍순이를 좋아하던 내가/아들의 고양이 사랑 덕에/고양이 사진을 같이 보게 되었다/자주 보면 예뻐 보인다는 말처럼/고양이 얼굴이 점점 사랑스러워지더니/어느 날, 고양이와 닮은 부엉이도 사랑스러워졌다.//그러니 사랑한다면/그것이 무엇이든지 자주 보라/이건 만고(萬古)의 진리(眞理)다.
--- p.114 「아들과 고양이와 부엉이」 중에서
그대 보았는가/흐르는 물/따라 보는 노송 한 그루//사는 일이란/숨처럼 느려졌다가/심장 박동처럼 요동쳤다가/얼굴색처럼 붉어지는 일//너른 강가엔 겨울바람 소리 나직하다./그 산, 젊은 소나무 숲엔/명이 다한 사람의 명함이/줄줄이 달려 있다.
--- p.134 「관송(觀松)」 중에서
사랑은 왠지 자주 보이는 것이다./많은 사람들 속에서도/너만 보이고//추운 겨울날/파란 양철 지붕 위에서/햇볕 쬐며 모여 있는/너만 보이는 것
--- p.138 「지붕 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