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도 얘기했지만, 우리는 네가 자의로 합류하길 바란다. 네가 공감과 연민의 마음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다. 그게 네 약점이고, 강점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이제 내가 왜 간수와 협력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너 또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얘기해 주겠다.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내게 해주겠다.“ 그녀가 감수할 건 없었다. 안두인은 어차피 그들을 섬길 것이고, 그러지 않는다면 이용당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이 어두운 전당 안에서 그녀가 한 이야기가 다른 필멸자에게 전해질 일은 없었다. 그녀의 승리가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안두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마치 실바나스를 조롱하기라도 하려는 듯, 그는 기품 있는 몸놀림으로 갑옷을 찰그랑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물잔을 손에 들고 그녀에게 건배한 후 마셨다. “그럼 말해봐라, 실바나스 윈드러너.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진실을 내게 말해라. 어차피 지금 내게 허락된 건 시간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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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고개를 숙여 아직 태양도 슬픔도 닿지 않은 동생의 부드러운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고개를 들려는 순간, 아기가 통통한 손을 휘두르고 작디작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몇 가닥 붙잡았다. “네 머리카락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큰 달님” 알레리아가 말했다. 따뜻하고 포근한 목소리였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만큼은 모든 것이 따뜻하고 포근한 것 같다고, 실바나스는 생각했다. “응.” 실바나스는 대답했다. 손에 잡힌 머리카락에 매혹된 듯한 아기를 바라보는 그녀의 작은 목소리에는 아직 경외감이 가득했다. “언니처럼 황금색 머리카락이네, 큰 태양님. 그럼 얘는 작은 태양님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태양이 둘, 달도 둘!” 베리사가 꺅꺅 소리치며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꼭 잡아라, 실바나스.” 리리사가 말했다. “아기가 다치면 안 돼.” 실바나스는 언젠가 아버지가 해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널 다치게 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어느 누구도 그러지 못하게 하겠어. 사랑과 용기로, 언제나 널 지켜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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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르테마르가 그녀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챈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순찰대원들은 언제나 상처나무 가루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그건 결정적인 순간에 생사를 가를 수 있는 도구였다. 상처나무라는 이름이 붙은 건 그 잎을 말리고 액체와 섞으면 마취 연고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걸 상처 부위에 바르면, 일시적으로 고통이 사라져 안전한 곳으로 탈출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살데릴은 몸을 꼿꼿이 세우고 뭐라고 말을 꺼내려 했다. “나도 테론의 생각에 동의한다.” 그때, 어디선가 우아하고도 명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바나스의 탈출로를 막고 있던 사람들이 빠르게 좌우로 갈라지며 왕자에게 길을 내주었다. “윈드러너 가문은 여러 세대에 걸쳐 선스트라이더 가문을 성실하게 성겨왔다. 왈가닥 소녀의 악의 없는 장난 정도는 얼마든지 용서해 줄 수 있겠지. 게다가,” 캘타스는 기분 좋은 말투로 덧붙였다. “나도 저 소년의 음악이 빠지면 무척이나 아쉬울 것 같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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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바나스는 이제 가슴 아픈 고통을 느꼈다. 슬픔으로 거칠어진 목구멍이 쓰라렸다. 내 고통을 붙잡을 것이다. 단단히 부여잡을 것이다. 그건 오직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고통이니, 마음껏 느낄 것이다. 그녀는 실체 없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흉포한 예전 주인을 향해 처음으로 독립을 선포하는 행위였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손바닥을 스쳤다. 느껴졌다?. 감각이 느껴졌다! 온 세상의 상처나무를 모두 삼킨 듯 온몸의 나른한 무력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마비되어 있었고, 한순간 지금까지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결의를 다잡았다. 그리고 엄청난 노력 끝에, 마침내 실바나스는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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