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이 나타나다
기분이 나쁜 채로 잠에서 깼다. 나는 나일뿐 그 이상이 될 수 없는데, 사람들은 나를 넘어서라고 요구한다.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홧김에 충동적으로 욕실의 거울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깨진 거울 조각 위로 피가 떨어졌다. 그때 그놈이 나타났다.
그놈의 숨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렸다. 숨이 멎어 버릴 것 같았다. 호흡이 가빠졌다. 사악한 기운이 느껴졌다. (중략)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주먹을 날렸다. 그놈의 배였다. 분명히 느꼈다. 내 주먹이 그놈의 배를 정확히 갈겼다. 그놈이 숨이 턱 막혀 발을 구르며 바닥으로 쓰러지는 소리도 들었다. 소리가 엄청났다. ---pp. 9~10
하지만 바닥에 쓰러진 건 여동생 마르타였다. 부모님에게 상황을 설명하려고 하는 순간 그놈이 도망갔다. 그놈을 잡아야 한다고 소리쳤지만, 아빠는 화가 나 동생을 데리고 방을 나갔고, 엄마는 침대에 걸터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병원 응급실에서 찢어진 손등을 꿰맸다. 의사는 네가 본 건 선잠인 채로 본 환영에 불과하다고, 혹은 성장기에 나타나는 호르몬 때문일지도 모른다며 세상에 괴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교했다. 아빠는 공포 영화, 비디오 게임, 사촌 안토니오에게 배우는 호신술 수업까지 내가 좋아하는 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금지령을 내렸다.
이 집에 내 편은 하나도 없다, 망망대해에 홀로 버려진 것처럼.
내 말 좀 들어 줘!
다음 날 과학 시간 또다시 그놈이 나타났다. 그놈을 잡아야 한다며 교실에서 난동을 피우자 마약을 했냐는 의심을 받게 된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미친놈이라며 수군거린다. 참다못한 나는 나를 놀려 대는 친구에게 주먹을 날렸다. 또 다시 학교로 불려간 엄마와 아빠. 그놈 때문이라고 설명해도 아무도 믿어 주지 않고 집에 와서도 부모님의 싸움이 이어졌다. 바로 그때, 그놈이 나타났다.
그 뻔뻔한 놈은 소리 없이 서재로 스며들어 와 벽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러더니 아빠가 책상 위에 놓아둔 물건들을 가지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작가였던 할아버지의 유품이자 우리 집안의 보물인 만년필과 크리스털 잉크병을 집어 든 채 떨어뜨리려 하고 있었다. (중략)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건 안 돼!”
잉크병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부모님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엉망진창이 된 방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pp. 51~52
아빠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내 뺨을 때렸고, 엄마는 방 끝에 있던 내가 병을 깨뜨렸을 리 없다는 걸 알고, 무턱대고 아들을 때렸다며 아빠를 비난했다. 최악의 하루였던 그날 밤, 나를 믿어 준 엄마를 위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놈의 시비를 참아 냈다.
다음 날 아침, 그놈은 더욱 난폭해져 내가 아끼는 물건들을 망가뜨렸다. 그놈을 무시하고,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깨진 거울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그 속에 그동안 사라졌던 물건들이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엄마의 생일 선물로 준비하고 있던 퍼즐 조각과 내가 아끼는 비행기 모형, 깨진 잉크병 조각, 그리고 엄마의 진주 목걸이까지……. 그 물건들을 만지고 있던 그놈과 눈이 마주친 순간, 배가 찢어질 듯 아파 왔다. 병원으로 실려 가 수술을 받았다. 거울 속에서 본 모든 물건들이 모두 내 위에 들어 있었다. 하느님, 맙소사!
내 편이 생기다
눈을 떴을 때 처음 보는 아줌마가 내 옆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희귀 케이스를 연구하는 심리학 전문가 덴치 박사였다. 나의 말을 믿어 주며, 그놈의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덴치 박사에게 신뢰가 생겼다. 무엇보다 내 편이 생겼다는 안도감에 그놈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느꼈다.
위가 빠르게 회복되어 퇴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심혈관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받는다. 그래서 뇌까지 피가 전달되지 않아 환영을 본 거라고. 심장 수술은 경과를 좀 더 지켜본 후에 하는 걸로, 의사와 부모님은 그렇게 합의를 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놈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믿었고, 의사의 진단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퇴원 후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미친 게 아니라 아프다고 여기는 아빠는 나에게 잘 대해 주려고 애썼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상황이 슬프기만 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갔다. 물론 심혈관 질환을 치료한다는 약을 먹은 후에. 하지만 약도 소용없었다. 그놈은 내 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놈을 향해 물건을 집어 던진 나는 부모님에게 또 다시 절망을 안겨 주고 말았다.
나는 덴치 박사를 찾아가 보이지 않는 어둠의 세계와 이 세계의 통로가 되는 거울의 전설에 대해 듣게 된다. 덴치 박사의 충고에 따라 최대한 그놈의 존재를 무시하고 어떠한 도발에도 반응을 하지 않기로 했다. 나의 그런 행동에 화가 난 그놈은 학교에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아이들이 공포에 사로잡히게 했다. 집에서는 아빠의 목을 감싸 질식하기 일보직전까지 갔다. 그놈이 점차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이 세계로 옮겨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다. 하루 빨리 그놈을 잡아야 했다.
결전의 시간
결전의 날 하루 전, 학교에 결석하기로 했다. 그놈은 내가 평소처럼 등교하지 않자 초조해하며 소리를 질렀다. 엄마도 그 소리를 듣고 그놈의 존재를 알아챘다. 엄마는 덴치 박사와 아빠에게 전화를 했고, 그사이 나는 학교 갈 채비를 하는 척하면서 그놈을 속이고 시간을 끌었다.
집에 온 덴치 박사는 욕실에 있었던 거울 조각을 건네주며 그 거울로 그놈의 몸에 찔러 다시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라고 말했다. 계획을 알아차린 그놈은 화가 나 덴치 박사를 들어 올려 내동댕이치고, 엄마를 위협했다.
나는 그놈을 진정시키기 위해 깨진 거울로 손에 상처를 입혀 피가 흐르게 했다. 내 피를 좋아하는 그놈은 피를 핥아먹으며 나를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방에서 그놈과 결판을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놈의 몸을 거울로 찌르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분노한 그놈은 나를 들어 올렸고 너무 아픈 나머지 소리를 질러 댔다.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아빠가 전속력으로 달려 들어왔다. 아빠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빠는 그놈이 나를 갈기갈기 찢으려고, 아니 나를 자기 세계로 데려가기 위해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아빠, 거울로 그놈을 찔러야 해요.”
아빠는 거울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그놈의 발길질을 간신히 피하며 거울로 그놈의 발을 찔렀다. 아빠는 왜 그래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내가 말한 대로 움직였다.
(중략)
거울이 그놈의 온몸을 거세게 빨아들였다. 남은 것은 이제 그놈의 무시무시한 손뿐이었다. 바로 그 손아귀에 아빠가 잡혀 있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아빠에게로 기어갔다. 거울이 아빠마저 서서히 삼키고 있는 중이었다. 아빠의 머리가 반 이상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아빠의 다리를 잡아당겼다. 내 목숨이 그 발목에 달린 것처럼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한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랬다.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pp. 152~153
또 다른 세상
그놈은 거울 속 세계로 사라졌다. 그놈을 가둔 거울은 덴치 박사가 안전한 곳에 숨겨 두었다. 아빠도 무사했다. 아빠는 혼란스러워했고, 아들을 믿지 못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아무 말 없이 아빠를 꼭 껴안았다. 아빠도 나를 힘주어 안았다. 아빠를 이보다 더 가깝게 느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중략)
영원한 고독 속에서 살아가도록 선고받은 생명체들로 가득 찬,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 우리는 더 이상 어제의 우리가 아니었다.
---pp. 158~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