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상을 향해 절하는 이를 우상을 믿는 자라고 우기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남장사의 소박한 법당 앞에 무심코 한번 서보거나, 자기 내면에 자리한 누군가를 만날 때까지 법당 마룻바닥에 앉아보라고 권면하고 싶다. 그렇다. 불상이이란 우상이 아니라 순간적이나마 삼독三毒을 씻고 홀연히 만나야 할 미소짓는 우리 내면의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 p.217
용천사를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절을 먼저 보지 않는다. 절 옆에 ‘왜 이제 왔어요’하고 부르는 꽃무릇을 먼저 찾는다. 나 역시도 꽃무릇이 무리 지어 피어 있는 산자락으로 올라가 상념에 잠긴다. 꽃무릇이 들풀처럼 피어 있다. 그리움이 사무쳐 발화점에 와 있는 느낌이다. 절 마을에 전해오는 설화 한 토막이 떠오른다. 신파극 같은 얘기지만 말이다. 한 여인이 용천사에서 수행하는 스님을 사모하였다. 여인은 미망인이었다. 여인은 스님이 죽은 지아비처럼 남자로 보였다. 그러나 스님은 애원하는 여인을 꾸짖었다. 그래도 여인이 절에 찾아오자 스님은 멀리 떠나 소식을 끊는다. 세월이 흘러 여인은 병들고, 결국 어느 여름 날 용천사 옆에서 죽는다. 바로 그해 가을, 여인은 잎을 내밀 새도 없이 꽃으로 먼저 환생한다. 그 꽃이 바로 꽃무릇이다. 나라면 여인을 맞아들여 한평생 아들 딸 낳고 살았을 것이다. 해탈보다는 사랑이 더 아름다운 것 아닌가. 시간이란 영원한 것이다. 금생의 해탈을 미루고 내생에 서로 도반으로 만나 도 닦으면 어떤가. --- p.247
지금 내가 가는 곳은 응진전이다. 응진전은 내가 누구인지를 되돌아보는 공간이다. 만해 스님이 정진했던 전각이다. 만해 스님처럼 화두를 들고 앉아 있지 않아도 된다. 열여섯 나한님들의 각기 다른 얼굴을 보고만 있으면 된다. 눈길이 오래도록 멈추는 나한님이 있다. 그렇다. 웃는 나한님을 따라 나도 마음속으로 하하하 웃는다. 번뇌는 어느새 저만큼 달아나버리고 텅 빈 마음에 무언가 충만해진다. 그것을 안심이라는 부르는 것일까. --- p.269
일주문 안 오른쪽 산자락에 선 남루한 탑은 떠돌아다니는 방랑자를 닮았다. 마을사람들은 갓처럼 생긴 옥개석이 너덜너덜하다고 하여 ‘거지탑’이라고 부른다, 미완의 탑이 분명하다. 그러나 운주사에서는 덜 다듬어진 탑과 불상들이 대접받고 있다. 세상을 지탱하는 이치가 바로 그거다. 미완성이 있으니까 완성이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미완의 소중함을 모른다. 나는 거지탑 바위에 기대선 ‘거지부처’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합장한다. 저절로 절하게 하는 거지부처이다. 욕심도 사랑도 미움도 다 버린 무욕無慾의 얼굴이다. 사람들은 운주사의 불상과 탑들을 보고 못생겼다고도 하고,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고도 한다. 그러나 누구라도 좌선대에 앉아 분별하는 마음을 벗어던져 보라. 눈과 코와 입이 어수룩하고 희미한 그것들을 껴안고 있는 운주사가 얼마나 장엄한 화엄의 바다인지 알게 되리라. 홀연히 ‘나’라는 교만을 버리게 하고, 절하게 하는 곳이 운주사임을 깨닫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