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은 왜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요청했을까?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 가르침, 성품, 전인격이 그의 비범한 기도생활과 관련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택하시고 당신을 따르도록 부르시기 전에 홀로 밤새워 기도하셨다. 수많은 무리를 돌보신 후에도 종종 홀로 물러나 기도하셨다.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가 얼마나 격렬했는지 알고 있다. 얼마나 강렬하고 열정적으로 기도하셨는지 흘러내리는 땀이 핏방울 같았다. 이토록 기도에 헌신하시는 것을 제자들이 모를 리 만무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아버지와 누리시는 친밀함을 목도하면서 그분의 능력이 기도와 상관있다고 결론지었다. (중략)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을 담지 않고 중언부언하는 기도습관에 빠지기 쉽다. 그리스도인들이 식사하러 모인 자리에서 주인이 그 자리에 있는 누군가에게 “식사기도 좀 해 주실래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 나는 가끔 당황스럽다. 주인이 부탁하는 것은 진짜 기도가 아니라 그저 식사기도를 해달라는 것이다. 그런 식의 언어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가 아닌, 단순한 암송을 암시한다. 심지어 주기도문조차 이런 식으로 취급될 수 있다. 주기도문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일부다. 지금도 많은 예배에 주기도문 암송이 포함된다. 교회 안에서 주기도문이 사용된 것은 역사가 오래되어,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거나 그것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우선순위들을 떠올리게 된다. 내 말을 오해하지 않기 바란다. 나는 주기도문 암송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기도문을 이런 식으로만 사용하다 보면 중언부언이 될 위험이 있다.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것이 이방인들이 사용하는 마술이나 주문처럼 내용 없는 헛된 반복이 될 수 있다.
R. C. 스프로울은 내가 처음으로 신학을 배운 선생님이다. 갓 믿은 신자로서 나는 그가 진행하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Renewing Your Mind)’ 라디오 방송을 청취하면서 신학과 철학, 교회사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는 『어떻게 기도할까?』를 통해 자신의 방대한 신학적, 철학적, 역사적 재능과 자원들을 기도라는 중대한 주제에 쏟아 붓고 있다. 이것은 워낙 중요한 주제인 만큼 잘 숙련된 선생의 손에 다루어져야 마땅하다. 그가 나에게 가르쳐준 다른 모든 것과 더불어,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우선순위를 배우는 데 그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더없는 특권이다. 이 짧은 책을 읽고 나면 당신 앞에 기도생활의 새로운 패턴이 펼쳐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