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깔아. 고집부리지 말고.”
지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경희가 거들었다.
“강요하지 마. 카톡을 하든 말든, 그건 개인의 자유야.”
남주가 시뻘게진 얼굴로 아이들을 노려보고는 교실을 나갔다. 툭 건드리면 터질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지만, 정윤은 수치스러웠다. 마치 자기들이 남주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건 강요가 아닌 애원이자 부탁이었다. 정윤은 그렇다고 믿었다.
남주가 나가고 한참 동안 이어진 침묵 끝에 경희가 불현듯 물었다.
“쟤 라인은 하려나?”
--- pp.20~21, 「다섯 혹은 하나의 이야기」 중에서
들어가는 데 성공하기만 하면, 그 안에서 줄을 넘는 건 문제없다. 하나 둘 셋에 맞춰서 줄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데, 왜 그게 안 될까?
아니야, 노력하면 할 수 있어. 지아는 자신이 그 정도로 열등하다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아자 아자 힘내자, 나는 할 수 있다. 지아는 가장 좋아하는 구호를 외쳤다. 배 안쪽에서 공허함이 밀려왔지만 그럴수록 더욱 큰 소리로 나는 할 수 있다, 를 외쳤다. 큰 소리를 내다 보면 작은 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것이 지아가 지금껏 살아온 방식이었다.
--- pp.47~48, 「지아 이야기」 중에서
학생 하나가 없는데도 선생님은 찾으러 오지 않았다. 이 학교에서 경희의 존재감은 그 정도다. 어, 한 명이 없네? 하면 누가 조퇴했어요 혹은 보건실에 갔어요, 라고 대답하고, 그러면 그래, 하고 마는 정도. 종례 시간이 돼서야 담임이 들어와 경희 언제부터 없었니? 하면 누가 아까 역사 시간부터요, 하면 무슨 일 있었니? 묻고, 아무 일도 없었어요, 배가 아픈가 봐요, 하면 그렇구나 하고 마는 정도의 존재감.
--- p.73, 「경희 이야기」 중에서
선화는 누가 자신과 똑같은 일을 당했다는 게 마음 아프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웠다. 그리고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이, 잠깐 혐오스러웠다.
“오늘 오후에 만나자고 했어. DVD방 건물에 있는 롯데리아 앞에서. 안 나가면 영상 올릴지도 몰라.”
“어떤 영상이야?”
“나도 잘 몰라. 캡처된 걸로만 몇 장 봤어. 내 허벅지랑 팬티가…….”
선화는 여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모른다는 게 공포심을 더 자극했다. 어떤 영상이 있는지 모르니까 자꾸 상상하게 됐고, 자신이 했던 행동이나 했을 것 같은 행동이 온종일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내가 더 적극적으로 굴었으면 어쩌지? 즐기는 것처럼 보이면 어쩌지? 그럼 아무도 나를 피해자로 보지 않을 거야, 라는 생각과 함께.
--- p.111, 「선화 이야기」 중에서
시를 쓰고 읽는 일이 무용하게 느껴졌다. 정윤은 시 노트 대신에 문제집과 연습장을 꺼냈다. 수학 문제를 풀고 영어 단어를 반복해서 적었다. 어쩌다 고개를 들어 교실의 아이들을 돌아봤을 때, 모두들 마침표처럼 공부하고 있었다.
물음표는 없었다.
그러자 다시 시를 쓰고 읽고 싶어졌다. 시는 명령하지 않는다. 시는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시는 묻는다. 시는 자신의 안부를 묻고 친구의 안부를 묻는다. 정윤은 친구들에게 시를 주고 싶었다. 친구들에게 시를 쓰자고, 우리 모두 시인이 되자고 말하고 싶었다.
--- pp.161~162, 「정윤 이야기」 중에서
“조별 과제 때문이니?”
선생님이 물었다.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에요. 저는 예전부터 단체 생활이 좀 힘들어요. 아시겠지만.”
선생님도 남주가 겉도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덧붙여 말하지 않았다.
“세상이 엉망진창이라고 생각해요. 당연히 학교도 엉망진창이고요. 다 엉망진창인 것 같아요. 더는 견딜 수가 없어요.”
“세상은 원래 그래. 카톡 문제로 네가 힘들었던 건 알지만, 우리 반이 특이한 경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 정도 다툼은 네가 어딜 가든 생길 거야. 혼자 살 수는 없잖아. 그러니 받아들여야지.”
“원래라는 말이 싫어요.”
남주는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말들을 꺼냈다.
--- p.183, 「남주 이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