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이론 내에서 프로이트에 대하여 처음으로 체계적인 비판을 개시한 사람은 시몬느 드 보봐르였다. 이 비판은 양날을 가진 거부의 형태를 취했는데, 한편으로는 여성에 대한 생물학적인 결정론적 또는 자연주의적 가설을 거부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을 계속적으로 남성의 심적 발달 모델에 종속시키는 것을 거부했다. 여성의 초자아의 발달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주장되는 남근 선망, 거세, 그리고 여성의 승화 불능과 같은 개념들을 비판하는 데 특히 관심을 쏟았다.
보봐르는 또한 여성이 심적, 정신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에서 담당해야 하는 필수 불가결한 '타자'의 역할을 중요한 문제점으로 부각시켰다. 그녀는 문화의 대표자로서 남성과 자연의 저장실로서의 여성 사이에 있는 성별화된 변증법적인 대립 구조를 지적했다. 보봐르의 분석에서는 타자성은 인간의 규범인 남성적인 것에 대한 열등함과 동의어이다. 다시 말해서 가부장제가 여성의 본질을 찾아내려고 했었던 이 '차이' 속에 보봐르의 중심적인 관심사가 놓여 있다.
보봐르의 뒤를 이어 제2의 페미니즘 물결의 모든 주요 텍스트들은 본질주의적 여성관, 즉 생물학적으로 결정론적인 여성관을 근거로 정신분석학을 계속 거부했다. 그들은 정치 이론의 변화에의 의지에 기초를 둔 욕망을 강조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그러한 이론에서는 생물학적인 차이의 구축에 대립되는 사회문화적인 영향력의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여성의 본질을 비본질화시키는 작업은 가부장제의 전복을 통하여 평등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가진 정치 과정의 일부로 여겨진다.
가부장제는 사회정치 체계일 뿐 아니라 심적인 질서로도 간주된다.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이데올로기가 실려진 개념으로서의 무의식을 거부하고 대신에 의지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정체성―성적, 심리적, 사회적 의미에서―은 남성적인 것이 지배하는 권력 체계의 결과이자 반영이라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정체성의 실제구조는 남성과 여성 간의 사회적인 노동분업에서, 특히 재생산과 관련지어서 구체적인 변화를 도입함으로써 전복될 수 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들은 또한 치료라는 정신분석학적인 관념을 정신분석하적 상황에 필요한 도구들을 무시한 채 여성의 선의식적인 소망과 욕망의 탐험을 허용하는 반대 전략으로서의 '의식 함양'의 실천과 대조시키고 있다.
--- p.130-131
이것은 원래는 프로이트의 용어지만, 상당한 의미 변화를 하여 좀더 일반적으로 정신분석적 용어로 사용되었다. 프로이트는 『성욕 이론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Three Essays on the Theory of Sexuality, 1905)에서 리비도를 성적 본능이 정신 속에 재현되게 하는 힘으로 보았다. 리비도는 양적으로 변할 수 있으며, 축적과 내쏟음이 가능한 그 어떤 것, 즉 물리적 용어로 이해되었다. 그것은 대상에 고착되거나 대상을 버린다는 의미에서 동적인 것이다. 리비도는 그 양에서 한정되어 있고, 만약 얼만가가 내부로 향해 있으면 외부로 향하는 집중도가 떨어진다. 만약 성적 만족을 위해 더 많이 사용되면 승화를 위해서는 더 적게 사용된다.
프로이트에게는 남성과 여성의 성욕을 모두 포함하는 '항구적이고 필연적으로 남성성적 성질인'(1905, p.219) 단 하나의 리비도가 있었다. 이 개념은 여성의 성욕(SEXUALITY)보다는 남성의 성욕에 더 적절한 것이라고 자주 비난받았다.
리비도 이론은 대상관계 이론과 충동(DRIVE) 또는 본능이라는 개념에 대한 비판이 발전됨에 따라 가장 급진적으로 수정된다. 에너지로서의 리비도의 양적인 형성 이론은 철회되었지만, 리비도가 쾌락 추구가 아니라 대상 추구라는 점, 그리고 대상관계를 통해서 한 인격으로 존재하고 발달하기 위한 강렬한 욕망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은 계속 유지된다.
--- p.356-357
라캉의 이론 중 페미니즘에 가장 밀접히 관련된 부분은 그가 생물학적이 아닌 논리적 주체를 공식화한다는 점이다. 프로이트를 문제화하는 그는 남자와 여자들 모두 사회적 동물로서 만들어진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고 한다. 다시 말해, 각 성은 무엇인가를 상실함으로써만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두 성 중 어느 쪽도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규범은 없고, 단지 아버지의 이름과의 연관하에서 기능하는 어머니의 욕망의 특수성에 의해 강요된 성적 차이의 희화화된 가면(MASQUERADE)만 있을 뿐이다. 프로이트는 (라캉이 <열락> 또는 충동의 만족이라고 번역한) 성적 흥분은 생식기 <그 자체>가 아니라 양성을 가깝게 만드는 것으로 본다.
생물학적 충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욕망의 '대상' 혹은 라캉이 팰러스(PHALLUS) 또는 부성 은유라고 부른 결핍의 표시와 관계하에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끌린다. '팰러스'라고 할 때, 라캉은 순수한 기표를 의미한다. 어머니의 욕망에 의해 유아에게 강요된 주체의 위치를 제한하는 결핍을 지시하는 세번째 용어다. 유아라는 의미가 어머니의 육체와 존재로부터 떨어져 나와, 언어와 문화쪽을 향하는 유아를 지시하지 않는 한, 이 정의는 유효하다. 정신병적 구조를 비축하지 않도록, 그래서 욕망은 이루어지지 않고 욕구가 세상을 향해 겨냥하지 않고 다시 어머니의 육체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절대적 존재 또는 일차적 대상으로서 어머니를 배제하거나 상실할 필요가 있다.
라캉은 그가 성별화라고 부르는 성적 차이는 남성적 입장과 여성적 입장 사이의 불균형 때문에 생긴다고 설명한다(Lacan, 1975bm p.73). 비록 남성들이 프로이트가 최초의 아버지로 신화화한 첫번째 입장을 고집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역설적인 거짓말이다(Freud, 1913, pp.149-50, 159-60). 그래서, 완전한 존재라는 느낌을 유지하게 하는 두번째의 남성적 입장이 받아들여진다. 그들 자신을 결핍의 법칙에서 제외된 존재로 생각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자신들과 다른 어머니와 동일시하지 않음으로써, 남자들은 집단, 전체, 내부와 동일시한다. 그들이 상실의 법칙에서 예외라는 것-상상적인 거짓말-은 남자들에게 외부는 한계를 지닌 것으로 정의된다. 이것 때문에 라캉은 남성의 성욕은 변태적이며, 여성, 대타자성, 외부의 것, 무의식을 주물화(fetishization)한다고 본다. 이 경우 남성은 여성을 하나의 병적 '증상'으로 본다.
--- p.328-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