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과후에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안정된 쉼이나 돌봄, 건전한 자유놀이나 또래문화입니다. 인지교육이 아닌 체험형 활동을 원하는 부모의 바람은 세상 물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순박하고 무모한 부모의 객기(!) 정도로 치부되었습니다. 그동안 이렇게 사교육 시장에 맡겨졌던 아이들의 방과후 시간을 국가가 교육의 일환으로, 복지의 일환으로 책임져 나가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입니다. 너무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작하는 말」중에서
어는 순간 세상은 너무 빨리 돌아가고 있고, 아이들에게도 빨리 배우기를 종용한다. 초등학교 3~4학년만 되어도 영자신문의 에세이를 출력해서 읽고 토론하는 학원수업이 있다고 하니 참 많이 달라지긴 달라졌다.(…)학원수업으로 뺑뺑이 돌지 않고 비움으로 자신의 놀이를 찾아가는 두근두근 아이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유일하다. 아이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재미있는 상상들을 펼치기에 아낌없이 퍼주는 바가지가 되는 것이다.
---「과천의 김병만 아니고 바.가.지」중에서
---「학교생활에서의 긴장감을 방과후에서만큼은 내려놓고 집과 같은 편안한 마음으로 본인이 원하는 놀이를 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학교가 교사와 친구들과의 공동체적 배움의 공간이라 한다면 방과후는 자기주도적이어야 하는 이유이다. 마치 직장생활을 하고 집에 오면 편안함을 느끼는 것처럼 방과후의 터전은 아이들 스스로가 선택한 휴식과 활동으로 채워지는 편안함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더 많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교사와 아마들은 이런 힘든 과정을 마다하지 않는다.
---「방과후는 ‘편안한 마음’이다」중에서
우리가 잘하는 것이 뭘까, 묻는 나의 질문에 아이들은 주저없이 노는 일을 꼽았다. 그 망설임 없는 대답이 좋았다. 많은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노는 일은 품이 많이 든다. 여럿이 함께 노는 일은 더더욱 그렇다. 같이 뭘 하고 놀지 정하는 과정부터 의견을 조율해야 하고, 팀을 나누거나 술래를 정하는 방법, 누구 한 사람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하지 않게 균형을 맞추는 일, 놀이에 몰입하고 마침내 그 놀이가 절정에 이르러서 익숙해질 때쯤 조금씩 변형하며 새로운 놀이를 탄생시키기까지 할 것이 참으로 많다.
---「독립출판물, 놀고들있네」중에서
“바가지, 이제 자전거 정비하는 것이 재미가 없어졌어요. 처음에 재미있었는데, 나중에는 다 알고, 할 줄 아니까, 그전처럼 재미가 없어졌어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애들아, 그럴 땐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하는 거야.” 아이들은 배웠을 것이다. 무엇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더 많이 배워야 한다는 것을, 가르칠 때 오히려 가장 많이 배운다는 것을. 그리고 또 하나,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바이시클 메커닉, 마인드맵을 그려라」중에서
저학년 한강 일주의 성공은 연이어 하트코스(3학년)와 인천 아라뱃길 코스(4학년)까지 확장되었다. 첫 자전거여행이 아이들과 가벼운 대화에서 선택되었듯, 지나가는 배를 보며 시작한 대화를 시작으로 9박 10일의 제주도 자전거 여행은 아마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했다. 일사천리다. 이러한 빠른 의사결정은 부모참여형 공동육아라서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두 바퀴로 함께하는 성장의 기록」중에서
불을 만든다는 것은 단순한 활동 그 이상의 감동이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레 있는 것이라고 느끼는 것조차 사실은 오랫동안 세월에 의해 축적된 지성의 결과물이라는 것. 그걸 경험함으로써 아이들은 시공간을 초월한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과 활동에 완전히 빠져들기 위해서는 그들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수평적 관계에서 충분히 기다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그 겨울 지하실, 불연구소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그 겨울 지하실, 불연구소」중에서
아무리 떼로 덤비는 아이들을 상대로 방바닥에서 서로 얽히고설켜서, 쪼이고, 꺾고, 비틀고, 누르고 하는 마구잡이식 레슬링이라 할지라도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명분이다. 그래야 뒤탈이 없다. 무슨 말인고 하면, 어른인 나도 역으로 아이를 공격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명분을 쌓아야 한다. 그 명분이 쌓일 때까지는 어느 정도 나도 고통을 참아내야 한다. 그래야 되갚아줄 것도 많이 생기고 그 되갚음을 아이들은 거부감 없이 스스로 받아들이며 이 놀이를 서로가 즐길 수 있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이 놀이의 규칙이고 무언의 약속이다.
---「황정호는 왜 울었을까」중에서
누가 잘못하고, 누가 사과를 받아야 하는 그런 차원의 갈등이 아니다. 갈등은 엉킨 실타래 같다. 섬세하게 인내심을 가지고 풀어내야 한다. 실 하나를 잡고 따라가면서 이리 통과하고, 저리 빼내면서. 이걸 언제 다 풀고 있어, 라는 마음으로 가위를 휘두르면 당장에는 매끈한 실오라기 몇 개를 건져낼 수 있겠지만, 원하던 것이 정말 몇 토막의 실이었는지 찜찜한 의문만이 남을 것이다. 아이들의 얘기는 한 시간 넘도록 이어졌다. 나는 가만히 들으며, 말하는 사람이 독점되지 않도록 조율하고 표현하기 힘들어하는 부분을 보태어 잘 전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섣부른 판단이나 결론을 종용하지 않으려 말을 아낀다.
---「둥글게 모여 앉아」중에서
한때 이러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을 때, ‘교육’, ‘education’의 어원을 알고 나서는 오히려 머리가 가벼워진 적이 있었다. 에듀케이션의 어원은 그리스어에서 출발했으며 뜻은 ‘밖으로 끌어낸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교육’을 많은 지식을 가진 교사가 일방적으로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거꾸로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스스로 꺼낼 수 있게 돕는 것이 교육이라고 한다. 이 의미가 너무도 신선했다. 그동안 가지고 살아왔던 마음의 짐을 한결 덜어내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중에서
조합이 부모들에게나 교사들에게나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래서 교사들은 그들의 자존감을 지키며, 아이들도 행복하고 부모도 행복한 방식이 조합 이외에 어떤 방식이 있을지 많은 고민을 하고 산다. 지금까지는 지금의 형태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우리 아이들만 잘 키우기 위해 조합의 형태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소통하며 교사와 부모, 지역사회의 3주체가 서로 긍정적 영향력을 주고받으며 성장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참여형 공동육아라는 선택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