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꽃잎 대신 사랑스러운 버찌가 매달렸을 때, 팔삭둥이는 세상 밖으로 나왔다. 2kg 겨우 넘는 작은 아이는 한참이나 눈을 뜨지 못해 그 봄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기억할 수가 없다. 작은 아이를 품에 안은 엄마는 다시금 하늘과 나무를 바라보았다. 세상을 안은 기분이었다. 엄마는, 당신을 떠나간 아이의 아빠가 지어준 이름 대신 버찌라고 나를 불렀다. 봄에 대롱대롱 매달린 버찌는 엄마에게 겁을 내지 말라고 말했다. 엄마는 한참이나 버찌를 바라보았다. 작고, 아름다웠다. 세상의 모든 별이 엄마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고독과 천진난만 속에서 당신은 살아갔고, 나는 매일 아침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울음으로 깨어났다. 당신은 울지 않았지만, 나는 자주 울어 당신을 괴롭히고는 했다. 엄마는 달래줄 틈이 없었다. 엄마는 외롭고 바빴다. 아팠지만 강했다.
우리는 긴 기간을 서로를 죽도록 미워하며,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며, 애타게 그리워했다. 몇 번의 봄이 오갈 동안, 버찌 열매가 열리고 다시 잠기는 동안 그저 바라만 보면서, 그렇게 시간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나는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못 하겠지만, 걱정해도 괜찮다고. 내가 함께 들어줄 테니, 다시 같이 길을 걸어보자고. 이제야 당신의 삶을 이해해서 미안하다고.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당신의 모든 모난 부분을 사랑할 것이라고.
나는 사람의 살을 만지는 것을 좋아한다. 친구의 팔뚝 언저리를 붙잡거나, 아이들의 불그스름한 볼에 손을 대거나, 노인의 늘어난 살들을 조물조물한다. 나는 그것들이 껍질이 아니라 껍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약한 살갗들이 아니라, 우리 몸을 감싸는 단단한 표피라는 생각이 들었다. 껍데기들은 내가 만져야만 비로소 살갗이 된다. 나는 그래서 사람을 만진다.
노인은 내게 곱다는 말을 연발하면서 내 몸에 손을 댄다. 나는 노인의 기억에 없다는 스물을 떠올려 본다. 노인의 생기 없이 부드러운 손가락들이 살갗에 닿자, 노인은 다시 노인이 된다. 나는 이번에는 나이 든 손에 내 몸을 바친다. 노인은 내 젊음을 자꾸만 만진다.
궁짱은 내가 당신이 필요한 순간마다, 신기하게도 항상 내 옆에 있었다.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는 내가 옆을 봤을 때, 정신을 차려보면 항상 그가 있었다. 귀에 들리지 않는 갖가지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건넸다. 그냥 사람이 필요하다는 내 말에, 그냥 옆에 있겠다고 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갑자기 등장하거나, 바닷가에서 눈물을 훔치는 내 옆에 가만히 다가와 앉거나, 그는 그런 식이었다. 이상한 감정들이 나를 바다로 보내려 할 때면 그는 나를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그처럼 정처 없이 달렸다. 바람결을 맞으며 궁은, 말없이 계속해서 달렸다.
아직도 고아에서의 시간이 신기루처럼 떠돈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당신의 기억들이 마음을 스친다. 당신은 어디에 있을까,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까. 혹은 존재하지 않을까. 내가 다시 이름을 불러주면,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면, 파도 소리에 발걸음 소리를 못 들은 채로 있다가 옆을 보면 당신이 있을까.
나는 다시 눈을 감는다. 당신에게로 달려간다. 당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 녹듯 사라지는 내 모든 불안에 작별 인사를 고한다. 당신을 위해 따온, 이미 이파리가 떨어진 들꽃 한 송이를 건넨다. 맑게 피어오른 당신의 미소를 보고 나는 함께 웃는다. 밤은 꽃과 함께 쉬이 낮이 된다.
바보 같아서 미웠다. 뭐라고 소리라도 좀 치지, 아니면 웃지라도 말지. 나는 아난에게 매번 무어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난은 그 바보 같은 미소만 지었다. 답답할 만큼 착한 사람인지 아니면 진짜 바보인지 매번 헷갈렸다. 다른 도시로 떠나는 날도 나를 쫓아오려 하기에, 왠지 짜증을 냈다. 바보야, 나 이제 가잖아. 이제 어차피 못 보잖아. 당하지 말고 살아. 많은 말들이 입에 고였지만 또 바보 같이 웃는 아난의 얼굴을 보니, 목에 걸린 말이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종종, 너의 속없는 미소가 사무치게 필요하다. 조건 없는 마음을 찾을 수 없는 세상에서 나는 이렇게 가끔씩 너를 떠올렸다. 그렇게 너를 생각하면 나는 나아졌다.
“싸울 때는 말이다. 니가 이케 성깔을 부리면 안 되고 어렸을 때 엄마랑 했던 거 알지. 손 딱 잡고 세 번 꼭 꼭 꼭 잡고, 마음속으로 사 랑 해 라고 외치면 돼. 그럼 싸우지 않아.”
나는,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사랑’이라는 단어를 여전히 귀중하게 간직한다. 때로는, 아주 쉬이 그것을 내어준다. 모든 강하고 여리고 야윈 것들을 안아본다. 시든 꽃은 다시 피지 않지만, 작은 꼬마와 나이 든 노인은 여전히 생생한 온도로 내 손을 잡는다.
싸우지 않은 어느 날 나는 애인의 손을 꼭꼭꼭 잡는다. 애인은 익숙한 듯 내 손을 꽉꽉꽉 누르며 화답한다. 손을 꼭꼭꼭 잡을 때마다 사랑은 자꾸만 커진다. 말없이도 사랑을 전한다. 말없이도 사랑을 받는다. 손금에는 사랑이 고였다.
풍경이 그림처럼 흘러간다. 너의 머리칼에 코를 파묻는다. 머리칼에는 연약한 햇빛의 냄새와 오래도록 얽힌 푸른 바다의 향이 난다. 숨을 크게 쉰다. 너의 냄새와 바람의 향이 뒤섞여 난다. 낯설고 익숙한 향이 너에게로 나를 이끈다. 가느다란 길을 달린다. 짠바람과 당신의 머리칼이 나의 얼굴을 때린다. 네 머리칼에 입을 맞춘다. 입속으로 바다의 태양에 노랗게 타버린 네 머리칼이 씹히고, 모든 것들이 괜찮아진다.
내가 좀 더 어렸을 때, 나는 몰랐거든. 담배를 피우거나, 쓴 커피를 마시거나 그래야만 어른이 되는 건 줄 알았어. 나는 불행이 어른이고 눈물이 어른인지 전혀 몰랐어. 울고 싶지만 우는 것을 잊는 밤들이 있잖아. 끝없는 잠을 자거나, 아주 조금의 자극을 기다리는 그런 밤들. 나는 그런 밤들이 어른인 줄 몰랐어. 아프고 불행한 것, 가엽거나 여윈 것을 보는 것이 얼마나 큰 어른인 줄 나는 정말 몰랐어.
조금만 더 기다려줘. 나는 이 길고 짙은 불행 속에서 조금만 더 뛰어놀게. 그러다가 자꾸만 까물까물 네가 아득해질 때면 불행과 어른과 시집을 집어 던지고 꽃밭에 숨어 있던 너를 찾으러 갈게.
할아버지가 죽었는데도, 동네는 조용하고, 하늘은 맑고 빨래는 어김없이 금방 말라버렸다. 바람도, 태양도, 할머니도, 나도, 그 누구도 할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 나는 그래서 슬픔이 몰려왔다. 눈물이 쏟아졌다. 할아버지의 기미가 촘촘히 박힌 살들과 스쳐 지나갈 때마다 나는 노인의 냄새가 그리워졌다. 내 몫까지 차려져 있는 주인집의 밥상이 생각이 났다.
연약하고 얄팍한 것들은 깨지기 마련이라고, 내 조각들처럼 내 연애도 그랬다. 늘 구멍투성이에 쉽게 깨졌다. 사랑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받기 위해 사랑했다. 사랑을 받기 위해 여러 모습을 만들었다. 내가 견고하게 만든 허상의 나는 누구나 좋아했으니까. 얄팍한 것들은 쉽게 깨진다. 사랑도 그랬고, 내가 만든 모습들도 그랬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