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나를 따르라’를 외치며 앞장서 해결하려는 의지와 도전 정신이 리더의 미덕으로 여겨지는 시대는 지났다. 그보다는 소속 조직이 맞닥뜨리게 될 문제들을 예견하고 가장 효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력이 필요한 키 플레어들과 평소에 긴밀한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필요시 언제든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역량이 리더에게 요구된다.
--- p.35
본능적으로 누구나 변화보다는 안정을 추구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리더의 자리에 앉으면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 전에 없던 새로운 성과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기곤 한다. 공공기관장 자리도 마찬가지다. 기관장 임기 내에 한 손에 꼽을 수 있는 나만의 업적을 쌓고 싶어진다. 당연한 마음이다. […] 공공기관장이 추구하는 혁신은 그 출발점과 종착점 모두 국민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해당 공공기관과 관련된 시장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워야 한다. […] 혁신의 목적과 방향이 국민 생각과 공익에 부합하면 조금 더디어도 괜찮다. 내가 추진하는 혁신은 전임 기관장들이 쌓아놓은 초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고, 내가 완성하지 못하더라도 후임 기관장과 기관의 발전을 위한 주춧돌이 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은 혁신의 속도를 늦추지만, 성과에 대한 조급함은 자칫 소모적이고 낭비적인 가짜 혁신 활동을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pp.62~63
이러한 혁신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외부의 솔직한 의견을 가감 없이 들어보는 절차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때 현행 법률이나 제도상 제약이라는 필터를 들이대선 곤란하다. 가려운 곳을 긁어주겠다고 팔을 걷고 나선 판에 ‘거긴 제가 긁을 수 없는 부위입니다’라고 한 발짝 내빼면 되겠는가? 몸에 좋은 약이 입에는 쓰다고 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쓴소리를 해줄 외부 전문가, 고객, 노동전문가, 언론계 인사 등으로부터 다양한 의견을 충분히 들어볼 것을 요청했다.
--- pp.69~70
정부에서도 플랫폼 경제를 우리 경제가 직면한 구조적 문제 해결을 위한 돌파구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모습이다. 2018년 8월 정부는 혁신성장 관계장관회의에서 “Innovative Platform: 혁신성장 전략투자 방향”(관계부처 합동)을 통해 혁신성장을 가속화하고 경제 체질 개선과 생태계 혁신 촉진을 위해 플랫폼 경제 구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 발표가 있고 얼마 되지 않아 원주에서 대통령 주재하에 공공기관장 워크숍이 열려 나도 참석했는데, 이 자리에서 김동연 당시 경제부총리가 직접 ‘플랫폼 경제’를 소개하는 강연을 한 것이 기억난다. 그 자리에서 ‘과연 이 자리에 있는 공공기관장들 중에 플랫폼 경제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신용보증기금이 금융 분야에서 플랫폼 경제를 선도해가야 하지 않겠나?’라고 생각했다.
--- p.143
공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공공기관 역시 자연스럽게 성장·발전하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이는 말 그대로 이상일 뿐이다. 현실에서 공익을 우선 추구하려면 기관의 희생이 따르게 마련이다. 극단적으로 공익만을 좇다 보면 기관의 존립이 흔들릴 수도 있는데, 공익을 위해 구성원들의 희생만을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희생만을 강요받는 이들에게 동기 유발을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공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마음가짐은 사리사욕의 절제, 공명정대한 업무 처리, 청렴 정신, 윤리성 등과도 일맥상통한다. 이 대목에서 어린 시절부터 우리 어머니가 자식들 귀에 못이 박이도록 하던 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공짜 좋아하지 말라’는 당부이다. 이 말이 그때는 그냥 가벼운 말씀으로만 들렸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공짜’의 유혹이 도처에 널려 있음을 알게 되었고, 점차 어머니가 염려하던 게 무언지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유혹의 순간이 닥칠 때마다 어머니의 그 말은 어김없이 내 머릿속에서 경종을 울리곤 했다.
--- pp.211~212
코로나19는 위기 양상과 영향력 면에서 과거와 차원이 달랐다. 기존의 위기는 크게 보면 실물 또는 금융 분야 중 어느 한쪽의 문제였다. 하지만 코로나19는 감염 확산으로 인한 실물경제의 위축이 금융 분야로 전이되며 순식간에 실물과 금융 분야 양 측면에서 위기 상황이 야기되었다. 지역적으로도 과거에는 동아시아 외환 위기처럼 국지적으로 발생했던 것과 달리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수수방관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내 기억 속 신용보증기금은 숱한 경제 위기 상황에서 언제나 버팀목 역할을 해오던 기관이다. 경제 위기 상황이 닥치면 정부는 금융시장 안정과 실물경기 침체를 방지하기 위한 정책금융 수단으로 신용보증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신용보증제도는 승수乘數효과를 통해 최소한의 재정 투입으로 유동성 공급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효율적인 제도이기 때문이다. […] 평소에는 사람들이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신용보증기금은 위기가 되면 국민들과 언론의 주목을 받는 가장 바쁜 기관 중 하나로 탈바꿈한다.
--- pp.215~216
신용보증기금이 사회적 가치 실현을 선도하는 기관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임직원들에게 사회적 가치가 내재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었다. 기관 명의로 특정 단체에 기부하는 것도 의미 있는 사회적 가치 창출 활동이지만, 이런 활동은 한계도 명확하다. 사회공헌활동을 하는 많은 이들은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에서 얻는 뿌듯함으로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게 마련인데, 단순한 기부 활동은 그런 느낌이 약하다. 흔히 말하는 사용자 경험 측면에서 빈약하다 보니 경험이 다시 새로운 시도를 만드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공헌활동 담당 부서에 작은 일이라도 임직원 참여도를 높일 수 있는 활동 위주로 추진하자는 방향성을 제시했다. 이런 관점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모았고 이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공헌활동으로 이어졌다. 전국의 영업본부별로 사회적경제기업과 공동으로 사회공헌활동을 펼쳤고, 1영업본부 1촌(村)·1영업본부 1전통시장 자매결연 맺기, 1인 1나눔 계좌 갖기 운동, 저체온증 위기의 개발도상국 신생아를 위한 털모자 뜨기 운동 등이 추진되었다.
--- pp.252~253
공직에 있을 때부터 여성 인력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내 나름대로 정리한 생각이 있었다. 과거 유교적 문화로 인한 남녀 차별을 없애자는 사회문화적인 관점만은 아니었다.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 확대는 인구절벽과 고령화에 따른 국가 성장잠재력 저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 중 하나이다. 저출산·고령화가 지속되면 경제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인력, 즉 노동력이 감소하게 된다. 그리고 경제 활동량이 적어 소득이 낮은 노령층 증가는 자연히 소비 감소와 정부의 세수稅收 감소로 이어지게 된다. 반면, 줄어든 세수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서 책임져야 할 소득이 없는 국민은 늘어, 정부의 지출 확대로 재정 부담이 늘게 된다. 나라의 성장잠재력이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p.299
노사 관계는 누가 누구를 끌고 다니고 말고 하는 관계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노와 사를 항상 대립 구도로 바라보는 인식이 만연했지만, 나는 노사 관계는 결국 기관의 발전을 위해 서로 다른 시각에서 생각하는 의견을 나누며 해답을 찾아가는 관계라고 생각해왔다. 건강한 노동조합은 생산적인 비판으로 직원들의 권리를 신장시키고 기관의 성장을 촉진시킨다. 노사가 서로의 입장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의견을 나눠야만 ‘정반합’을 거쳐 회사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오너 경영 체제가 아닌 공공기관의 경우, 기관장의 임기마저 정해져 있으니, 과연 기관장에게 ‘사용자’라는 말이 적합한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공공기관의 기관장과 직원들을 주主와 객客으로 구분하자면?궁극적으로는 당연히 국민이 주인이겠지만?기관장보다는 직원들이 주인에 더 가깝지 않을까? 기관장은 임기 동안 머물다 떠나는 ‘객’에 가깝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약 30년을 근무하는 직원들이 웬만한 기관장보다 기관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 각별할 텐데, 그들을 결코 ‘객’이라고 볼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공공기관 직원들이 외부 출신 기관장이 취임할 때 낙하산 인사라고 반대하는 것도 ‘주인의식’의 발로라고 이해할 수 있다. 역량이 부족한 기관장이 ‘내’ 회사를 망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누가 오든 ‘낙하산’으로 단정 짓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행태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말이다.
--- pp.340~341
현장경영에 나서 직원들과 대화를 나눌 때 늘 빼먹지 않고 강조하는 이야기가 몇 가지 있다. 가장 먼저 이야기하는 것은 공직자로서의 자세, 특히 청렴이다. […] 내가 하도 이야기하고 다녀 ‘젊은 사자는 썩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말은 신용보증기금 내에서 유행어가 되었다. 나는 젊은 직원들에게 “업무적인 과실은 실수로 여겨지고 다시 만회할 기회가 있을 수 있으나 청렴과 관련된 문제는 원 스트라이크 아웃입니다. 한순간의 실수로 인생을 그르치는 것만큼 어리석고 후회스러울 일이 또 있겠습니까?”는 말로, 긴 안목을 지니고 떳떳한 공공기관 직원으로 생활하라고 인생 선배로서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 그 자리를 함께한 선배 직원들을 향해 일부러 이런 이야기도 한다. “직장이란 곳이 후배 직원에게 얼마나 불리한 구조입니까? 지식이나 경험, 나이, 정보, 사내 인적 네트워크도 부족한데 직위까지 낮아 안 그래도 주눅 들기가 십상이죠, 옆에 있는 선배까지 무서워하게 되면 출근하고 싶겠어요? 신입 직원들한테는 70을 하면 30이 부족하다고 야단치는 선배가 아니라 부족한 30을 기꺼이 채워주는 따뜻한 선배가 필요합니다.”
--- pp.363~364
결국 내가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고심 끝에, 대면 행사를 취소하게 되는 최악의 상황이 온다면 받아들이겠지만, 그게 두렵다고 준비를 미뤄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바로 ACSIC 조직위원회를 발족했고, 본점에 TF팀도 설치했다. 요새 많이 쓰는 ‘뭘 좋아할지 몰라 다 준비했다’라는 표현처럼, 코로나19 상황이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기에 대면·비대면·하이브리드 대면·하이브리드 비대면까지 네 가지 방식*을 모두 준비하도록 했다. 국경이 완전히 봉쇄되거나, 국가별로 출입국 조건이 다르게 적용되는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대응 시나리오를 만들어야 했다.
회원 기관 모두 참석할 수 있도록 개최 일정도 신중히 검토했다. 아시아 각국의 공휴일, 기관별 주요 행사 등을 파악하여, 3년 만에 회의에 참가하는 각 기관의 입장을 세심하게 반영했고, 개최 도시는 고심 끝에 신용보증기금 본사가 있는 대구로 정했다. 대구에서 행사를 개최하면 서울보다 입국, 의전, 수송, 개최 시설 등 여러 면에서 준비상 어려움이 더 따르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결정한 것은 대구 혁신도시로 이전한 공공기관으로서 지역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내 신념과 우리 정부의 지역 균형 발전 정책에 대한 홍보까지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대구에서 가까운 거리에 ‘천년고도’ 경주가 있다는 사실도 이런 결정에 한몫했다. 참석자들에게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주요 예술 작품들을 관람하며 ‘K-Culture’의 근원을 느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싶었다.
--- pp.414~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