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을 앞둔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제야 널찍한 집을 갖게 되었다. 아니 갖게 될 것이다. 지난겨울 시작한 두 분의 집짓기는 여름이 된 지금도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았다. 집을 짓는다는 것이 어떤 철저한 계획 아래, 준비된 설계 도면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내 부모가 짓고 있는 시골집은 그런 것과는 무관해 보인다. 그들이 짓고 있는 집이란, 생활이고, 삶이며,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인생의 한 부분 같다. 그들은 돈이 생길 때마다 황토 벽돌을 사다가 방을 만들고, 돈이 떨어지면 공사를 멈추었다가, 다시 여유가 생기면 창에 새시를 달고 화장실에 타일을 까는 식이니, 어떤 근사한 집에서의 안위를 염두에 둔 집짓기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분명한 것은 그 과정에 즐거움과 사명감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드디어 올 장마가 시작되기 전 1층이 완공되었다).
무심한 큰아들이 아버지의 예순아홉번째 생일을 맞아 잠깐 집을 찾았을 때, 아버지는 스케치북 하나를 보여주었다. 그곳엔 빼곡하게 스케치와 메모가 되어 있었다. '장독대'에 대한 도면에는 ‘무릎이 편치 않은 어머니가 최대한 무리하지 않고 한번에 올라설 수 있는 높이로 맞출 것’이라는 메모가, ‘마당’ 도면에는 ‘두 개의 화단을 만들 것, 어머니의 채소밭과 아버지의 꽃밭을 마주 보게 조성, 화분들은 마당 한가운데 모아 또 하나의 꽃밭’이라는 메모가 적힌, 우리가 아는 설계도와는 다른 그것을 보면서, 그간 자연스럽게 터득한 그들만의 미와 앞으로의 꿈 같은 것을 얼핏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스케치북을 보며 나는 무심한 아들이자 조금 그저 그런 인간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2층에 내 작업실을 만들 거라며, 방학 때마다 창작 공간을 찾아다니는 나를 그때만이라도 집에 붙들어놓을 수 있는 묘책을 궁리해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버지의 소박한 서재였다. 평생 처음으로 갖게 된 아버지의 서재는(서재가 따로 없어서 아버지의 책 때문에 우리 집은 언제나 비좁았다) 안방 안, 가장 은밀한 곳에 숨어 있었다. 봄엔가,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서는 집에 있는 자신의 책을 버려도 좋은지 물은 적이 있었다. 가서 보니 작은 서재를 꾸미는 데 많은 책들이 버거웠던 모양이다. 내가 물려받게 될 책들은 창고에 잘 정리되어 있었다. 어머니 말로는 그 은밀한 방에 들어가면 몇 시간씩이고 나오질 않는다고 하니, 말년에 아버지가 또 다른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 어머니가 짓고 있는 집을 위해 내가 한 일이라곤, 용돈을 조금 쥐여주고, 모든 창에 우드블라인드를 달아준 정도다. 돈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것, 그게 내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 얍삽함의 극치인 셈이다.
소설도 하나의 집을 짓는 것과 같다. 터를 잡고, 기초 공사를 하고, 무너지지 않게 기둥을 튼튼히 박고, 원하는 방향으로 창을 내기도 하고, 취향에 따라 인테리어도 하는 집짓기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작업이다. 4년여 지어온, 세번째 소설집을 바라본다. 집이란 모름지기 내 아버지의 스케치북 도면에 그려진 것처럼 자연스러운 배려가 가득해야 하는데, 곰곰 살펴보니 그런 면면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어렸을 때, 뽑기 같은 것을 하면 나오는 ‘다음 기회에’나 ‘꽝’을 뽑아든 느낌이다.
부모가 짓고 있는 집과 내가 지은 집의 차이에 대해 골똘해진다. 집을 짓는 데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에는 간절함과 절실함, 가장 자연스러운 인테리어, 분수에 맞는 장식들, 실용성 등 여러 가지가 있을 테지만, 무엇보다 집 안에서 살아야 할 사람에 대한 사랑이 제일이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니, 내가 지은 집에 무엇 하나 자신이 없다. 내 인물들에 대한 사랑에 자신 없어지는 순간이다. 그러니 내가 지은 집 같지 않고 낯설기만 하다. 다음 기회에, 내 부모가 지은 시골집 같은 사랑으로 가득한 소설을 꼭 짓겠다고 다짐만 해본다.
해설을 써준 이광호 선생께 한없는 고마움을 전한다. 원고를 맡아준 후배 김필균에게는 위로와 축복. 마지막으로 내 소설을 기억해주고, 참아주고, 읽어주는 소중한 독자들에게 오래 참았던 인사를 남긴다.
2011년 여름
원주에서 백 가 흠 拜
---저자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