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야청빛이었다. 그래서 불빛들은 마치 강물에 어린 은하수 무리 같았다. 한 순간 불빛들이 수많은 나비떼처럼 보이기도 했다. 낯익은 얼굴들이 그 불빛 속에서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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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년아, 같은 건 그에겐 욕도 아니었다. 그의 파격적인 언행에는 확실히 사람들을 사로잡아 묘하게 흥분시키는 경쾌한 오만이 있었다. 그 열기에 편승되면 어떤 소심하거나 무딘 자아라도 청춘의 우울한 배면-곧 독약 같은 허무를 전투적으로 상승시키고야 마는 것이다. 말을 쉽게 독설이 되고, 퇴페가 무성해지고, 자학과 만용이 겹쳐 어떤 뻔뻔한 행위도 서슴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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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는 할아버지의 장례가 끝나는 날 내게 두 가지 제의를 했다. 첫번째 제안은 자기와 같이 살자는 것이었다. 다만 양색시들을 상대하는 아주머니의 거주 환경이 마음에 걸린다 했고, 그래서 두번째 제안으로 아주머니가 부탁해놓았다는 목사집을 이야기했다. 가정부가 아니라 보모 역할이 될 것이라는 점을 아주머니는 강조했다.
"네 스스로 결정하렴. 내 생각엔 아무래도 목사네가 여러 모로 네게 좋을 거라 생각되는데, 일단 가봤다가 혹시라도 마음에 안 드는게 있으면 언제든지 나에게 오면 돼. 그러니 잘 생각해서 결정해라."
어차피 산을 내려가긴 해야 했다. 산주인은 곧 과수원과 산을 관리할 새 일꾼을 구할 것이고, 그러면 집도 내주어야 했다. 집이야 할아버지가 직접 지은 것이었지만 집터는 산주인의 소유였다. 새 일꾼이 구해지면 그의 숙소로 집도 양보해야만 할 처지였다.
아주머니의 제의는 그 당시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끈이었다. 그러나 나는 바로 거처를 옮기고 싶지가 않았다. 아직 식량은 남아 있었으므로 나는 적어도 개학이 될 때까지는 혼자서 지내고 싶었다. 아주머니는 언제든 찾아오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나는 산지기 딸에서 산지기 소녀가 되었다.
한동안 잊었던 그림으로 돌아갔다. 거의 하루종일 그림에만 매달렸다. 생각도, 상상도 하지 않았다. 내 의식 속에서 무언가가 떠오르면, 그것은 최소한의 인식 작용도 거치지 않은 채 바로 그림으로 번역되었다. 내 그림은 그려진 게 아니고 나타난 것이었다. 나는 매번 완성된 내 그림 앞에서 깜짝 놀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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