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생수 산업과 우리가 마시는 물의 미래를 보다 깊이 들여다보고자 한다. 이 책을 쓰면서 생수를 생산·판매하는 기업과 이에 반대하는 열정적인 환경 운동가들을 만났고, 작은 병에 물이 담겨 상품이 되고, 종국에는 플라스틱 폐기물 매립장으로 보내져 수백 년 동안 땅속에 묻히는 상황도 탐색해보았다. 필자는 ‘생수’가 장기적 관점에서 안전한 물을 공급해오던 공공 급수 체계의 쇠퇴, 전 세계적 차원에서 안전한 물의 불공평한 접근권, 광고와 마케팅에 쉽게 동화되는 사람들의 성향, 태어나면서부터 구매와 소비, 폐기에 길들여지는 현재의 사회현상 등을 아우르는 다양한 현상의 집합이라고 본다. 이같이 광범위한 현상을 포괄하는 관점이어야 생수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 p.7
생수 이야기는 엄청난 규모의 숫자를 동반한다. 수십억 갤런의 판매량, 수십억 개나 되는 플라스틱 병의 생산과 사용, 폐기, 수십조 달러에 이르는 판매액, 수십억 톤의 이산화탄소와 오염 물질의 발생 등이 그것이다. 한편으로는 10억 가까운 인류가 여전히 마실 물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며, 수십억 명이 수인성 전염병을 앓고, 그중 어린이가 대다수인 수백만 인구가 죽어가는 현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 pp.8-9
미국 교외에 사는 소비자가 집 안에서 콸콸 나오는 수돗물을 외면하고 생수를 잔뜩 사서 카트를 끌고 돌아오는 그즈음에, 딱히 다른 대안이 없기에 더러운 물을 큰 통에 담아 몇 시간이나 끌고 집에 가는 중노동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여성과 소녀의 슬픈 현실을 그저 풍자의 이분법으로 넘길 수가 없는 것이다.
--- pp.9-10
회의는 자유주의 시장경제론을 주창하는 경쟁기업연구소Competitive Enterprise Institute, CEI 프레드 스미스 소장의 기조연설에서 극에 달했다. 스미스는 병에 물을 담아 파는 기업가들의 손에 돈을 쥐여주는 세상의 호의를 극찬했다. 나중에 스미스는 필자에게 정색을 하더니 “공공재로써 물은 너무 천대받고 있다”고 했다. 그는 “현재의 수자원 정책은 석유 채굴 때와 같은 전략으로 변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문제는 그 같은 입장이 물 판매 논쟁의 핵심이기도 한 ‘물은 석유 등의 사유재와 하등 다를 바 없다’는 확신에 근거한다는 점이다.
--- p.28
1886년에 준공된 뉴욕 시의 공공 급수대에는 신약성경 〈요한계시록〉 21장 6절에서 인용한 구절이 각인되었다.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 p.42
유심히 보지 않으면 제대로 보일 리가 없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핵무기 감축 협상의 핵심을 “믿음, 그러나 증명이 먼저다”라고 말했다. 이 속담은 무기 감축 문제에도 적절한 표현이지만, 오염된 물도 그처럼 생각할 수 있다. 미국이나 다른 나라를 막론하고 언뜻 보아서는 수돗물에 비해 생수가 수질에 별문제가 없을 것 같다. 이렇게 인식하는 원인은 둘 중 하나다. 실제로 생수가 안전하거나, 진짜 문제를 보지 못하거나. 대개는 후자가 맞을 것이다.
(중략)소비자가 부담하는 비용으로 생각해볼 때도 생수의 수질이 나을 것이란 추측이 그럴싸하겠지만, 그런 추측이 검증된 것인가 하는 점이 문제다. 안타깝게도 실제 검사 결과를 눈여겨보면 생수의 수질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음이 드러난다. 미국 이외의 나라, 특히 생수의 수질 관련 규제가 전혀 없는 곳에서는 생수 수질이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문제가 있다는 증거가 쌓여가고 있다.
--- p.66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물병에 든 것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그것이 물이기를 바라고 물이란 것도 알지만 그게 어떤 물인지는 거의 모르며, 겉으로는 그럴싸한 이름과 역사적 연관성을 풍기지만 대체 어디서 온 물인지 알지 못한다. 그 물이 깨끗하고 위생적인 물이라고 짐작해보지만 그런 생각은 틀릴 가능성이 농후하며, 어떤 처리와 검사를 거쳤고 그 결과는 어떠했을지도 전혀 모른다. 물맛이 좋기를 바라면서도 실제로 물맛을 결정하는 광물질의 구성에 관해서는 들은 바 없다.
--- p.81
터무니없는 작명 사례는 무궁무진하다. 악틱(북극)은 생수 이름으로 가장 선호되는데, 원시의 동토와 눈 덮인 산정 그림이 저 먼 북쪽 얼음 나라의 전설적 순수함을 상징하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악틱 스프링(북극의 샘)’은 플로리다에서, ‘악틱 폴스(북극의 폭포)’와 ‘악틱 울프 스프링(북극 늑대 샘)’은 뉴저지에서 취수하는 것이다. ‘악틱 폴스 퓨리파이드(북극 폭포 정화수)’는 오클라호마, ‘악틱 클리어(북극의 깨끗함)’는 테네시에서 나오는 물이다. 빙하라는 상표를 본 소비자는 원시 야생의 얼음 들판을 떠올리며 생수병을 집어들겠지만, 안타깝게도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중략) ‘알래스카 프리미엄 글레이얼(알래스카의 특급 빙하)’는 주노 시의 수도 배관 111241번에서 취수하는 물이 확실하다. 굳이 따지자면 알래스카 지역에서 나오는 물이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 pp.85-87
네슬레는 이 협곡에 자사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 귀중한 물의 주인이 회사와 다른 목적으로 물을 사용하고 있었다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중략) 공장장 카일 커스트가 생산공정을 따라 함께 걸었다. 공장 바닥에는 커다란 시베리안허스키만 한 기계가 도사리고 앉아 작은 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PET 알갱이를 끌어들여서 병이 되기 직전의 형태(프리폼)를 만들어 1분에 수백 개씩 쏟아내고 있었다.
검사를 통과한 프리폼은 최신식 송풍 확장기를 통과하면서 115도의 열이 가해져서, 우리에게 익숙한 네슬레 병 모양이 되어 물을 담기 위해 대기 상태로 들어간다. 옆에 있던 기계가 새로 만들어진 병을 잡아 줄을 맞춰서 물 담는 공정으로 들여보내면 사전에 처리되어 저장고에 있던 물이 채워지고 병마개가 닫히며, 수위가 알맞은지 검사를 거친 뒤 최종 봉인이 씌워진다. 새거나 수위가 적절치 않은 병은 공정에서 자동으로 폐기된다. 다 채워진 병 표면에는 풀칠이 되고 곧 레이블이 부착된다. 레이저프린터가 병에 일련번호를 기록하면 골판지 상자에 24개씩 담고, 겉포장에 유효기간 도장을 찍는다. 이 상자들은 이동용 팔레트 깔판에 놓여 지게차로 근처 저장고로 옮겨지고, 천장 높이까지 쌓여 보관되다가 트럭에 실려 미국 서부 각지로 배달될 것이다. 마치 기계적 효율성이 빚어내는 춤판 같았다. 카바존 공장의 기계들은 1분에 2,500개, 즉 1시간에 15만 개, 하루로 환산하면 360만 개를 쏟아내고 있었다. 미국에 산재한 다른 생수 공장까지 합치면 1년에 수십억 병의 샘물을 생산하는 셈이다.
--- pp.101-102
소비자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에너지 비용은 상당한 차이가 난다. 로스앤젤레스에 살면서 피지워터를 마시면 플라스틱 병을 생산하는 데 드는 것에 버금가는 운반비가 드는 셈이다. 로스앤젤레스에 살면서 에비앙이 필수품이라면 운반비는 더욱 높아진다. 최고의 에너지 소비 운송 수단인 개인용 비행기를 타는 사람이 피지워터만 마신다면 그는 에너지 비용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원자재, 생산, 수송까지 감안한 생수의 에너지 비용은 생수 부피의 4분의 1 혹은 그 이상의 원유라 볼 수 있다. 생수의 에너지 비용은 수돗물이 생산되어 우리에게 오기까지 드는 에너지보다 1,000배 이상일 것이다.
--- p.119
필자는 가끔 먼 미래의 고고학자가 우리의 매립장을 발굴하다가 촘촘하게 배열된 플라스틱 병들을 찾아내고는 이것들은 초기에 의도적으로 탄소 격리(탄소 등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를 직접 모아 탄산염 등 적당한 담체나 지하의 특정 공간에 저장하는 것─옮긴이)를 실시한 흔적이라고 결론짓는 어이없는 상황을 그려본다. 즉 현명한 조상이라면 플라스틱 폐기물 처리 중 최악의 방법인 매립을 이렇게 대량으로 실시했을 리 없으니, 자신들이 발견한 이 유적은 급격한 기후변화를 몰고 오는 이산화탄소 발생을 줄이기 위해 지구온난화의 주원인인 플라스틱 물질을 일부러 매립한 현장이라고 넘겨짚는 일종의 오해 말이다.
--- p.120
가장 흔하고 수상한 생수의 주장은 물 분자가 자력, 전기력 등에 의해 마법처럼 재구성되어 건강, 에너지, 향취가 증진되었다는 것이다. 사이비 과학적 용어, 얼음 조각을 조작·재배치한 요상한 사진, 개인적 경험담, 때로는 정체가 의심스러운 에모토 마사루 박사의 희한한 보고서 등으로 무장한 야바위성 재구성물 수십 종이 시중에 나돌고 있다. 물과는 매우 거리가 먼 국제관계학으로 학위를 받은 에모토 박사는 얼음 결정체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마법의 기기를 보여주면서 음악, 웅변에 철학까지 들먹이며 자신의 주장을 풀어낸다. 도우미로 등장한 사람은 고전음악을 들려준 물의 결정은 아름다운 수정 형태를 띠지만, 헤비메탈을 들려주었더니 일그러진 결정을 형성했다면서 여러 장의 사진을 증거라고 보여준다. 급기야 ‘고맙다’ ‘사랑과 감사’ 등의 글자를 적은 종이를 물병에 붙여놓았더니 물이 결정을 아름답게 재구성했으며, ‘아돌프 히틀러’라고 붙인 병 속의 물은 흉악한 결정을 보여준다고 덧붙인다. 에모토 박사는 지구상의 인간이 오스트레일리아 은하계에서 죄를 짓고 추방당한 종족의 후손이라는 글을 발표한 적도 있다.
--- p.165
종교 역시 물을 성스럽지 않은 목적에 사용해온 역사가 있다. 공상과학 작가 론 허버드는 “돈이 좀 필요하면 책을 쓰고, 많은 돈을 벌고 싶다면 종교를 창시하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려는 듯 1950년에 《심리치료법Dianetics》이란 책을 내면서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라는 신흥종교를 창시했다. 몇몇 생수 업자들은 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생수를 팔려면 다양하고 복잡한 노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데, 일부 업자들은 마케팅에 종교를 끌어들여 훨씬 쉽게 목표를 달성하는 셈이다. 일부는 말장난 수준에서 끝나기도 하지만, 일부는 심각한 표정으로 끝까지 밀고 나간다. 이들 외에도 다양한 집단이 있는데, 이들을 규정하는 게 만만치 않다.
--- p.175
물이 결코 시장에서 사고파는 물건이 될 수는 없다. 이제 이런 주장에 맞서기 위해 탄산음료나 청바지를 팔고 사는 것보다 훨씬 근본적인 차이를 지적할 때가 되었다. 이처럼 생수와 물 문제는 중대하고 근본적인 변화 속에서 새로운 시각을 요구하고, 지역사회와 환경 운동가, 대중이 함께 대처해야 할 필수 과제가 되고 말았다.
--- p.186
물은 공공의 관리와 보호 대상으로 남겨두기 위해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가 되었다. 사람과 물의 관계는 변해야 하고, 그 변화는 진행 중이다. 우리는 결정적인 변화의 중심에 있기에 다가오는 몇 년 동안 우리가 선택하는 길이 특권 부유층을 위해 병에 담겨 제공되는 안전하지만 값비싼 물 혹은 개인적인 수도 체계, 아니면 모든 사람들을 위한 보다 포괄적이고 안전한 물 체계 중 어느 것이 자리 잡을지 결정할 것이다.
--- p.222
생수를 두고 벌이는 논쟁은 물의 가치, 인권과 책임, 환경 우선과 보호, 사유재와 공공재, 정부 개입과 개혁 등을 어우르는 데까지 범위가 확대되어야 한다. 이제라도 우리가 사려 깊게 행동하여 현재의 생수 열풍이 공공 수도 체계가 실패한 결과라는 것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사람들이 왜 그렇게 목말라하는지 진실로 이해할 때 비로소 생수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휴, 이제 수돗물 한잔 마시러 가야겠다.
--- p.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