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옥관 시인의 눈에 띄고도 시가 되지 않는 사물/사건은 거의 없을 성싶다. 봄비나 어머니 같은 전통 서정시의 제재는 물론, 날계란 장수의 절규나 차에 치여 검붉게 으깨진 새, 심지어 자신의 오줌발까지, 다른 각도에서 볼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억지나 엉뚱함도 마다 않고 질기게 물고 늘어져 시로 바꿔놓는다. 시인에게는 때로 걷는 일조차 새삼스럽다. “차도로 다닐 땐 몰랐던” 샛노란 길의 등뼈가 보인다. 장애인이 발바닥으로 하나하나 핥으며 만드는 존재의 걸음걸이처럼, 시인도 “온몸으로 핥아야 할 시린 뼈마디”, 그 실존의 등뼈 짊어지고 있음을 아프게 깨닫는다.
「걷는다는 것」 「달의 뒤편」 「오줌꽃」처럼, 인식의 상투성을 깨부수고 대상의 본질을 찾아내어 깨달음에 이르는 구조는 장옥관 시의 전형이다. 존재의 비의는 자연과 우주의 심원한 밀실에 있는 게 아니라, 당신 발밑에, 당신 눈앞에, 바로 우리들 곁에 있다는 사실을 시인은 끊임없이 깨우쳐준다. 그렇다고 장옥관의 시가 교시에 치우치는 것 또한 아니다. 「가오리 날아오르다」 「가부좌 틀고 앉아 새끼를 낳다」 「홍어」 같은 일군의 작품에는 엄청난 힘으로 들끓는 상상력이 있다. 종횡무진 날아오르고 솟구치는 동사들의 역동성은 시인의 깨달음을 명상의 산사에서 신명나는 난장으로 옮겨놓는다. 이 언어의 난장판에서는, 썩어 문드러진 세월도, “도둑질로 이골난 축축한 마음”도, “그 무슨 무시무시한 생활”도, 보름달에 내어다가 구수하게 말려준다. 명상과 신명이 만나 신생의 은빛 달풀을 키우는 시, 장옥관의 시.
-김양헌(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