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나의 친구이자 보호자인 '고집쟁이 달팽이'와 술집 '외상은 어림없지'의 손님들과 (거짓말 조금 보태서) 이 이야기를 들려준 나의 어미니 폴린 캉귀에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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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나는 동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동물에 지나지 않고, 인간들이 자기네 종(種)은 우리만큼 야생적이지도 않고 짐승 같지도 않다는 듯이 '야생 짐승'이라고 부르는 부류이니 그들에게 나는 그저 일개 가시도치일 뿐이지, 그네들은 자기들이 보는 것밖에 안 믿으니 나에게 아무 특별한 점이 없다고, 그저 기다란 가시로 무장한 포유류의 일종이라고 잘라 말하겠지, 그들은 또 덧붙이기를 나는 사냥개처럼 빨리 달리지도 못하고 워낙 게을러터져서 먹이가 있는 곳에서 멀리 떠나서는 살 수도 없다고 떠들어 대겠지 까놓고 말해서 나는 인간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은데, 나 자신이 오랫동안 키방디라는 인간의 '분신'이었던 까닭에 인간들이 소위 떠벌리는 지성이라는 것을 우습게 여기는 탓이야, 〔……〕 내가 없으면 키방디는 가엾은 식물인간에 지나지 않으며, 그의 인간으로서의 삶은 내가 아직 동물의 세계에 속하던 시절에 우리를 다스리던 가시도치 영감님의 오줌 방울만큼도 가치가 없기 때문이야
--- pp.9~10
그래, 나는 그 무렵에 행복한 가시도치였어, 그리고 그 사실을 긍정할 때면 온몸의 가시를 곤두세우지, 우리는 그런 식으로 맹세를 하거든, 오른발을 들고 연달아 세 번 흔드는 것도 맹세를 하는 또 다른 방식이야, 내가 알기로 인간들은 맹세를 하면서 이미 죽은 자들 가운데 우두머리를 들먹거리거나 자기네들이 섬기는 신을 동원하는 습속이 있지, 한 번 본 적도 없고 눈을 감은 채 숭배하는 신을 말이야, 그래서 인간들은 두툼한 책에 기록된 신의 말씀을 읽는 데 평생을 바치지,
〔……〕 나는 그 신의 책을 온전히 통독했더랬어, 참 흥미진진하고 비장한 책이라고 해주지, 나는 내 몸에 돋은 가시로 몇몇 대목에는 밑줄도 그었어, 〔……〕 카리스마가 넘치는 방랑자 녀석이―그들이 신의 아들이라고 인정하는 녀석인데―엄청 까다로운 수단을 동원해서 세상에 태어났다는 거야, 그 책에는 녀석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떻게 교접을 했는가에 대한 상세한 언급조차 없는데 말이야, 물 위를 걸었다는 게 바로 그 녀석이지,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했다는 것도 그 녀석, 조그만 빵 덩어리를 몇 배로 불려서 사람들의 배를 채워 주었다는 것도 그 녀석, 사람들이 돌을 던지는 창녀들을 감싸 주었다는 것도 그 녀석, 제일 차도가 없는 중풍 환자들을 일으키고 장님을 보게 했다는 것도 바로 그 녀석이야,
〔……〕(하지만) 나의 주인은 항상 신속하고 구체적인 결과를 원하고, 낙원 따위에는 털끝만치도 관심이 없는 사람인지라, 신이 매번 그 기도는 내일 들어주겠다는 식으로 차일피일 미루는 한 절대로 신을 믿지 않았어,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가끔씩 이 마을에서 제일 독실하다는 신자들이 늘어놓는 말을 중간에서 끊어 먹을 때면 "당신이 지금 하는 이야기를 신에게 해보시구려, 신이 포복절도할 테니까"라고 내뱉곤 했지, 그러니까 인간들이 죽은 자들의 우두머리를 들먹거리거나 전능자의 이름으로 맹세를 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데, 그건 까마득한 옛날 옛적부터 인간들이 하던 수작질이고, 언젠가는 결국 자기 맹세를 깨뜨리고 만다는 말씀이야, 왜냐하면 인간들은 말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 말을 믿는 사람만 문제지, 안 믿으면 그뿐이라는 걸 잘 안다고
--- pp.18~21
출판사 관계자 여러분께
저의 오랜 친구이자 이제 고인이 된 깨진 술잔의 유언장 집행인 자격으로 편지를 드립니다. 독자들에게 이 원고의 유래를 좀 더 명확히 밝힌다는 차원에서, 이 편지가 그의 책 <가시도치의 회고록> 뒤에 공개되었으면 합니다. 〔……〕사실, 저는 작년에 고인이 사망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귀사에 등기우편으로 원고를 보냈습니다. 당시에는 저도 그것이 그의 유일무이한 원고라고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그 원고를 쓰게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저였고요. 저는 제가 운영하는 술집 '외상은 어림없지'를 길이길이 기념하기 위해서 그런 글을 부탁했던 겁니다. 그 첫 번째 원고를 귀사에서는 몇 달 뒤에 <깨진 술잔>(* 한국에서는 '고집쟁이 달팽이'의 의견을 수렴하여 <아프리카 술집, 외상은 어림없지>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셨지요. 비록 저는 그 제목이 <외상은 어림없지>가 되기를 희망한다는 의견을 정식으로 피력했지만 말입니다. 귀사에서는―책을 위해서 그러셨겠지만―제 의견을 고려하지 않는 쪽으로 결정하셨지요……
'외상은 어림없지' 술집의 사장
고집쟁이 달팽이 드림
--- pp.203~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