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면, 그리고 황금마차
면회 장소는 이미 만원인 것 같아서, 뙤약볕에 천막을 쳐놓은 곳으로 갔다. 그곳도 이미 사람들이 면회를 하고 있어서 우리는 한 귀퉁이에 돗자리를 폈다. 30도를 웃도는 열기 때문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들을 만난다는 설렘에 이런 더위쯤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이 천막은 원래 군인들이 빨래를 말리기 위한 곳이라 들었는데, 오늘이 마침 주일이라 빨래를 한 모양인지 옷이 널려 있었다. 그런데 군데군데 널려 있는 옷마다 이름이 큼직하게 쓰여 있었다. 잃어버릴 것 같아서인가? 30분이 지났는데도 아들이 나오지 않았다. 예날 부대처럼 금방 올 줄 알았더니 물어볼 데도 없고...."너 이제 한 1년 남았지?" "아뇨, 11개월 26일 남았어요." "그게 1년이지 뭘." 옆에서 들려오는 대화가 정겹다. 군인들은 며칠 가지고 꼭 날짜를 따진다. 우리 아들은 남은 것보다는 지난 것을 계산한는 것이 더 빠르다. 오늘이 166일째, 달력에 하루하루를 지우며 표시를 해두었기 때문에 난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안 오지? 거의 1시간을 기다렸을까. 차가 들어왔던 길로 군인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아들이 틀림없었다.
--- pp.118~119
엄마의 열세번째 편지
가을이 왔구나. 잘 지내지? 너 입대하던 그 해 가을에는 떨어진 낙엽을 들고 너를 생각하기만 해도 눈물이 주르르 흘렀었다. 군복 입은 사람만 지나가도 네 생각이 나서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 너, 지나간 시간들 그냥 지나간 것이 아니니까 잊으면 안된다! 앞으로 사회에 나와서도 군인정신으로만 밀고 나가면 뭐든 척척 잘될 거야. 이제 한 6개월 정도 남았지? 아마 지나간 시간보다 남은 시간이 더 길게 느껴지겠지만 잘 참아라. 그래도 요즘은 집보다 더 편하다며? 저녁이면 세상에서 제일 편한 자세로 책 일고, TV도 시청하고, 게다가 요즘은 올림픽 때문에 시청할 것이 얼마나 많니? 도서실에서 책도 빌려보고, 정말 군일 팔자 좋아졌다, 그치?
--- p.230
아들 오는 날
온 산천에 꽃이 만발해 있고, 벚꽃 축제로 떠들썩하다. 자연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그런데 왜 이렇게 예쁜 꽃을 보아도 내 눈에는 이슬이 맺힐까? 꽃보다 더 아름다운 군인들.... 아들을 입대시켜 놓고 나니, 군인만 보면 가슴이 져며오는 것 같다. '사랑하는 아들아, 보족한 이 엄마에게 원망 한마디 안 하고 잘 견뎌주니 고맙구나.' 오늘은 4.19가 일어난 지 39돌이고,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우리 나라를 방문한다고 떠들썩하다. 우리 집에는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씩씩한 군인이 4박 5일 휴가를 오기로 되어 있어서, 아침부터 마음이 ㅅㄹ레고 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기도하러 가는데, 발걸음이 가벼워서 성경책을 안고 뛰었다. "하나님, 늘 감사 드립니다. 아들이 군 입대하고 나서 간염 보균자라 하여 걱정했는데, 훈련 잘 받고 아무 탈 없이 오늘 집에 오니다. 오가는 발걸음을 인도해 주시고, 남은 기간도 함께 해주십시오. 그리고 이 나라를 불쌍히 여기셔서 하루 빨리 통일이 되게 해주십시오. 우리 60만 군인들 한 사람도 이탈하지 않도록 마음을 붙들어 주십시오.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오늘도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을 본 후에야, 흥얼거리며 돌아와 아들의 방문을 열어보았다. 흐트러진 것이 없는지, 닷 찬찬히 둘러보았다. 며칠 전부터 청소하고 정리한 방인데도, 왜 그렇게 뭔가 빠지고 부족한 느낌이 드는 건지....장미꽃 향기가 싱그럽다. 빨간 장미 7송이와 꺼내놓은 옷들이 몇 시간 후면 도착할 씩씩한 주인을 맞을 것이다. 준비는 완벽하다. 아침밥 먹고, 신고하고, 파주에서 오면 오전에는 도착하겠지? 우리 아들 복무하는 중에, 아니 그 후에라도 전쟁은 없어야 하는데,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 봐 하루하루 가슴을 졸인다. 북한의 경제난이 심각하다고 하는데,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 pp.68~69
가문에 경사났네.
입영 통지서를 보면서 웬일인지 동작동 국립묘지에 세워진 비석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누군지 모를 이들에게 감사하고 싶었다. 마음을 강하게 먹을수록 눈물이 더 흘러내렸다. '내가 울면 안 되지. 강하고 당당하고 담대해져야지. 사랑하는 내 아들이 돈주고도 못 배울 것을 배우러 가는 것인데....' 눈물로 얼룩진 얼굴 화장을 고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아들이 얼른 통지서를 받아서 읽었다. "진짜 의정부네! 보충대?" 아들은 좀 생소한지 얼굴에 긴장감이 감도는 것 같았다. "이 기쁜 날 그냥 있을 수 없지?" 나는 얼른 하얀 백지 위에 글씨를 써서 현관 앞에 붙였다. '축, 군 입대. 가문에 경사났네!' "네가 태어난 것, 건강하게 잘 자란 것, 군 입대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엄마에게는 경사란다."
--- p.21
1999년 10월 31일
새벽 공기가 무척 차갑다. 아마도 내가 기도하는 이 시간에도 아들은 보초를 서고 있겠지? 강가라 추위가 두 배로 느껴질 것이다. 아침 뉴스를 듣던 중에 일하던 손길이 멈춰졌다. 탈영병 얘기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파주 모 여단 24세 하사와 21세 권 모 일병이 근무 도중 실탄과 총알을 가지고 탈영, 미아리 텍사스촌에서 술에 만취해 있는 것을 시민의 신고로 검거했다고 한다. 파주 모 여단이면, 우리 여단?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들과 같은 나이에 계급도 일병이었다. 고참이 탈영하자고 해도 따라가야 하는 걸까? 고참이 졸병을 따라가지는 않았을 것이고, 요즘은 군 생활이 좋아져서 탈영하는 군인이 별로 없다는데....이제 그 둘은 어떻게 되나? 부모들 가슴이 찢어지겠구나!
--- p.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