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신이 여행한 장소들을 기억하는 여행자가 아니라 그 장소들이 그를 기억하는 여행자이다. 사람들만이 아니라 염소, 고집 센 당나귀, 낙타, 공작새, 떠돌이 개들도 그를 기억하고 작별을 아쉬워한다. 그에게 ‘사랑의 신’이라는 뜻의 고빈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인도의 사두까지도. 누가 저곳에 저토록 많은 상처를 버렸을까 하고 그가 카메라에 담은 히말라야 밤하늘의 별들도.
여행의 길에서 ‘다시 만나자’고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말하는가. 그러한 아름다운 기억이 무의 세계를 떠도는 부재하는 우리를 실존에 이르게 한다.
류시화 (시인)
이종선이 인도에 가서 찍은 사진들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양을 안은 아이, 주유소의 소년과 당나귀, 닭을 안은 아버지와 아들, 고양이와 소녀, 강아지와 아이들……. 한결같이 동물과 사람이 한데 어울려 있는 풍경들입니다. 그리고 동물과 사람이 한데 어울린 풍경의 배면에는 늘, 흙이 있군요, 흙바람벽 혹은 흙마당. 어려서 소를 키운 적이 있습니다. 소, 돼지, 염소, 토끼, 닭, 개. 내가 키운 동물의 종류입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어느 날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학교 동물장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는 내게 동물장 안에 있던 교장선생님이 불쑥 토끼 두 마리를 내밀었습니다. 나는 토끼를 안고 집으로 뛰었습니다. 토끼는 새끼들을 부지런히 낳았고 나는 그 새끼들을 시장에 내다팔고 염소를 샀고 염소를 팔아서 돼지를 샀고 돼지를 팔아서 소를 샀던 것입니다. 개와 닭이야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 집에 살던 동물들이구요. 우리는 동물과 함께 살았습니다. 동물이 없는 집은 집이 아니었고 동물과 함께 살지 않는 삶은 삶이 아니었습니다. 닭소리, 개소리, 염소소리, 돼지소리, 소 소리가 나지 않는 우리 시골집은 생각만 해도 무섭습니다. 동물이 살지 않는 집은 사람도 못삽니다. 동물은 그러니까 그 집 사람들과 한 식구입니다.
가을이었습니다. 토끼에게 먹일 마른 잎을 따러 가을 뽕밭에 갔습니다. 누에에게 다 먹이고 남은 뽕잎은 바스락바스락 말라갑니다. 뽕잎을 따다가 그만 ‘땡끼벌’집을 잘못 건드려 죽을 뻔하면서 따온 마른 뽕잎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토끼를 바라보면서도 나는 토끼가 하나도 밉지 않습니다. 토끼똥을 치면서도 하나도 더럽지 않습니다. 식구이기 때문입니다.
겨울이었습니다. 돼지가 우리 밑 땅을 파고 도망을 갔습니다. 장꽝의 장단지를 다 깨고 도망을 갔습니다. 눈발이 휘날리는 들판과 산을 헤매다 추위와 배고픔에 덜덜 떨며 나무둥치 밑에 웅크리고 있는 우리 집 말썽꾸러기를 보는 순간, 나는 엉망이 된 장단지 따위는 생각지도 않습니다. 망태기에 돼지를 담아 집으로 오는 길은 집 나간 동생을 찾아 데려오는 기분입니다. 이종선의 사진에서 나는 나를 봅니다. 내 식구들, 소, 돼지, 염소, 토끼, 개, 닭들. 그리고 또 생쥐들. 미치게 그립습니다.
공선옥(소설가) ‘그리운 내 식구들’ __이종선 ‘어린이와 동물 사진전’ 추천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