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중재자 중항열
중국인과 흉노족의 만남에서 아마 가장 예상 밖의 결과는 미묘한 입장에 처한 중국인이 야만인 사회로 달아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흉노족을 패배시키지 못한 중국 군대가 그에 대한 처벌이 두려워 집단으로 흉노족에게 투항하는 일이 가끔 있었다. 국경을 지키는 중국 장군들은 흔히 흉노족과 교역하곤 했는데, 그들은 상대를 잘 알았으며 출세 기회를 노리고 국경을 넘어가는 사람의 수는 결코 적지 않았다. 한나라 국경에서 전해지던 유명한 속담 하나가 이런 태도를 간명하게 말해 준다. “북쪽으로는 흉노족으로, 남쪽으로는 운남雲南으로 달아날 수 있지.”
그런 이탈자들이 문화적으로 어떤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는지 잘 말해 주는 예가 중항열中行說의 사례이다. 중항열은 한의 태자를 가르치는 사부였는데, 흉노족 묵특선우의 후계자인 계육稽粥의 조정에 파견되었다. 중항열은 자신이 가게 되면 한 왕조에 좋지 않은 결과가 생길 것이라고 예견하고 파견을 피하려 했지만, 결국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계육은 중항열을 좋아했으며 중항열도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중항열은 새 주인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우선 그는 흉노족이 독립을 유지하도록 자문해 주었다. 그의 조언에 의하면 흉노는 중국의 사치품을 쓰지 말 것이며 자신의 관습을 개발해야 한다. 가시덤불을 뚫고 말을 타고 다닐 때는 가죽이나 펠트천이 비단보다 훨씬 더 유용하다. 실용적인 가치 때문만 아니라 토착 의복을 입는 편이 흉노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인구가 훨씬 많은 중국에 흡수되지 않도록 버티는 데 유리할 것이다. 다음으로, 중항열은 계육에게 중국식의 행정기술과 외교술을 가르쳤다. 그는 주군에게 인구 조사를 하는 방법을 가르쳤고, 가축 보유 상황을 조사하도록 했다. 또 중국의 외교적 화법에 대응하여 중국인들을 민망하게 만들고 그들을 수세로 몰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중국의 비판에 맞서 흉노의 관습과 가치를 옹호했다. 그는 흉노족의 엄격한 가족 관념과 부족에 대한 충성심을 찬양하고, 중국인들은 가족관계가 너무나 느슨해지다 보니 친족들끼리도 서로 죽고 죽이는 지경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흉노의 입장을 대변하여 한의 외교관들을 상대로 중국의 퇴폐와 도덕적 해이를 거리낌 없이 지적했다. “애석하도다! 흙으로 지은 집에서 사는 한나라 사람들이여. 자신들을 돌아보고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말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오. 관을 쓴다한들 무슨 쓸모가 있겠소?” 그는 이렇게 경고했다. 한의 사절단은 흉노족을 깔보고 훈수 두려는 마음을 버려야 할 것이다. 그저 중국의 공물만 제때 전달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 벌로 공격을 당할 것이다.
--- p.58-59
“신앙의 문제에 관해 강요는 없다.”
초기 무슬림은 아라비아 반도 바깥에서는 개인적으로 이슬람 신앙을 강요하지 않았다. 코란은 선교 사업을 벌이고 개종자들을 이슬람으로 끌어오도록 권장했지만 강요는 하지 말 것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신앙의 문제에 관해 강요는 없다.”(『코란』, 2: 256)
무슬림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메시지를 밝힐 의무가 있지만 이슬람의 대표자로서 끈질기게 고집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없도록 명백한 지시를 받았다. 선교사들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의 운명에 대해 책임을 진다. “그들이 돌아선다면 너는 책임이 없다. 우리는 그들을 지키는 간수로 너를 임명한 것이 아니다. 너의 임무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42: 48)
초기의 수많은 개종자들은 물론 진정한 지적?정신적 확신에 따라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하지만 이 신앙이 전파된 방식이 특히 효율적이었다. 왜냐하면 불교와 기독교와 달리 이슬람은 처음 생겼을 때부터 이미 국가가 후원하는 종교의 지위에 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우마이야 왕조 때 이미 북아프리카에서 근동 전역에 퍼졌던 이슬람교는 아쇼카왕 때의 불교가 누리던 혜택, 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종 이후 기독교가 받던 특별한 혜택을 누렸다. 그 결과 초기 단계부터 정치적?법적?사회적?경제적 동기들의 도움을 얻어 개종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무슬림 통치자들은 대부분의 경우 백성들에게 기존의 전통적 종교를 허용했다. 하지만 비무슬림이 살아가는 여건은 흔히 새로운 이슬람 사회로 통합되지 못한 울타리 속의 게토에 한정되어 있었던 데 비해 무슬림들은 권력과 권위가 따르는 지위에 올라갈 여지가 더 많았다. 이 역시 초기의 무슬림들이 개인 차원에서 신앙을 강요했다는 뜻이 아니라, 국가의 후원에 힘입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보상을 주며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벌칙을 주는 정책을 시행했다는 것이다.
--- p.134-135
칭기즈칸을 도운 거란 귀족 야율초재
개인적으로 매력을 느꼈기 때문은 아니지만 몽골인들은 유가의 효용도 일부분 인정했다. 이 맥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거란의 귀족인 야율초재耶律楚材(1189~1243)였다. 금 왕조 때 북경에서 태어난 야율은 공식적인 유가 교육을 받았으며 여진인 정부의 관료로 일했다. 그는 다른 관리들과 마찬가지로 몽골이 북중국을 정복한 이후 큰 시련을 겪었으며, 삼 년 동안은 그에게 위안을 주었던 불교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218년에 칭기즈칸의 부름으로 공직 생활을 재개했다. 그 뒤 20년 동안 야율은 칭기즈칸의 비서관, 자문관으로 일했으며, 칭기즈칸 본인과 그 다음 계승자인 오고타이칸의 정부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동안 그는 몽골의 중국 통치가 겪는 어려움을 완화시키도록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면 1230년대에 그는 금 왕조를 초토화하고 북중국을 목초지로 만들어 버리려는 몽골의 호전주의자들에 반대했다. 그는 전통적인 중국의 징세 체계가 호전파의 급진적인 계획보다 몽골에게 훨씬 많은 부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고타이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야율초재의 예견대로 많은 세금 수입이 들어왔다.
유가 학자들이 몽골의 새로운 지배자들에게 처벌과 박해를 받지 않도록 그가 개입한 사례는 셀 수도 없이 많다. 그는 학자들을 몽골의 관료나 몽골 왕족들의 교사로 추천했다. 그는 또한 몽골인들이 철폐했던 유학儒學에 의거한 과거제도를 부활시켜 유가적 전통으로 교육받은 유식한 정부 관료를 모집하려는 작업도 추진했다.
하지만 야율은 결코 몽골인들을 유교화하지 못했다. 공직에 있던 기간 동안 그는 초원 정치의 원리로 중국을 다스리려 하는 몽골의 호전주의자들과 맞서 계속 싸웠다. 결국 오고타이칸의 치세 말년이 되자 적들이 그를 무너뜨리고 정부에서 몰아냈다. 온건한 조처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사라지자 몽골인들은 중국의 백성과 자원을 수탈하는 가혹하고 무모한 정책을 감행했다. 몽골인의 중국 통치의 전성기였던 쿠빌라이칸의 치세 기간에도 몽골인과 중국인 사이에는 심각한 긴장이 존재했다. 마르코 폴로는 이 점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했다. “중국인들은 위대한 칸의 지배를 혐오했다. 자신들을 타타르인이나 사라센인들의 지배 하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국인을 노예처럼 다루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그들의 지배를 견딜 수 없었다.”
--- p.207-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