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생태비평의 잠정적인 정의를 살펴보자. 최초의 정의는 미국 생태비평의 주요 논문 선집인 『생태비평 독본』(The Ecocriticism Reader, 1996)의 「서문」에서 발견된다.
생태비평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생태비평은 문학과 물리적 환경 사이의 관계에 관한 연구이다. 페미니즘 비평이 언어와 문학을 성차 의식 관점에서 점검하고, 마르크스주의 비평이 생산 양식과 경제적 계급에 대한 인식을 텍스트 읽기에 불러오듯이 생태비평은 문학연구에 대지 중심적으로 접근한다. (xix)
셰럴 그롯펠티(Cheryll Glotfelty)에 의해 생태비평이 이렇게 정의된 이후, 다음과 같은 생태비평적 질문들이 제시된다. 그 질문들은 ‘이 소네트에는 자연이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가?’로부터 ‘야생성의 개념이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 또한 ‘과학 그 자체가 문학 연구에 어떻게 열려 있는가?’ 그리고 ‘역사, 철학, 심리학, 예술사, 윤리학 등 환경 관련 인접 학문과 문학 연구 사이에는 어떠한 긍정적인 상호 영향이 가능할 것인가?’로 이어진다.
본문 13쪽
『침묵의 봄』을 수사로 읽는 것은 공공연히 정치 이슈화되는 비평의 여러 이점을 지닌다. 정치 이슈화되는 비평에 대해서 마르크스주의비평가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은 다음과 같이 개진한 바 있다.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연구에서 특징적인 것은 … 담론이 생산해 낸 ‘효과’의 종류와 담론이 ‘효과’를 생산해 내는 양상이다. 기린에 대해 알아보려고 동물학 교과서를 읽는 것은 동물학 연구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그것의 담론이 어떻게 구성되고 조직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읽는 것, 그리고 이러한 형식과 장치가 실제 상황에서 구체적인 독자에게 어떠한 종류의 효과를 산출해 내는지를 점검하는 것은 다른 종류의 프로젝트이다. 사실, 그것은 아마도 수사학으로 알려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문학 비평 형식일 것이다. (1996: 205)
필자는 문화를 수사로 읽을 것이다. 수사학자들이 이해하는 엄밀한 의미의 수사가 아니라, 대규모 메타포의 생산, 재생산, 변형으로서의 수사로서 말이다.
19쪽
이 책 3~5장은 타락하고 쫓겨난 인간이 재기를 도모하지만 최후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유럽-아메리카, 유대기독교 서사에 깊이 영향을 받은 일련의 비유, 즉 ‘목가’, ‘황야’, ‘종말’을 검토하고, 이 비유들이 현대 세계에서 형성한 결과의 의미에 대해 평가한다. 6장은 대지 위의 ‘거주’에 관련된 서로 다른 두 개념 즉, 땅에서 일하는 것에 관해 기록하는 유럽의 ‘농경시’ 전통과 최근에 많이 논의되고 있는 조화로운 존재의 잠재적인 모형으로서의 토착적 생활방식을 비교한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이렇게 구성되었다는 논의 과정에서 인간 종과 다른 종 사이의 차이가 당연시되는 문제점이 노정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7장은 야생 및 가축 동물이 재현되고 개념화되는 다양한 방식을 조망한다. 필자는 ‘인간이라는 것’에 대한 재검토가 생태비평의 핵심 과제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생태비평을 목가 전통과 자연기 문학으로부터 글로벌화나 인간과 과학기술의 사이보그 중첩과 같은 포스트모던적 관심으로 견인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는, 우주에 떠있는 지구라는 특별한 이미지에 관련되는, ‘글로벌 시장’으로부터 ‘소중한 거대 유기체’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의미들을 탐색하게 될 것이다.
30-31쪽
시적 어휘에 대한 명상으로, 우리는 ‘언어가 인간이 거주함으로써 살아가는 “존재”의 집’(Heidegger 1993: 237)이라는 점을 발견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본질, 즉 그것의 자율성과 인간 의도에 대한 그것의 저항은, 이와 유사하게 저항하는 언어에 의해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시를 통해 ‘인간은 존재의 군주가 아니라 존재의 목동’(245)이라는 점을 배우게 된다. 항상 존재를 편협하고 환원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는 ‘틀에 가두기’(Ge-stell) 또는 도구주의에 대한 저항을 배우게 된다. 제한 없이 자신을 드러내려는 존재의 요구에 대한 조율을 도모하게 된다.
55쪽
아우구스티누스의 종말신학은 그러므로 희극적이고 비재앙적이며, 빛과 어두움 두 세력 간의 투쟁이 아니라 신자들 자체 내에 진행되는 도덕적 갈등을 강조한다. 이러한 윤리적 미묘함은, 자유의지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천년왕국적 열광을 경계하는 교회에 보다 안정적인 도덕적 이데올로기를 제공하였다.
종말이 가까이 있든, 그렇지 않든, 신자들은 그것의 가능성을 생각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렇다고 유토피아적 히스테리의 발작으로 세속적 의무를 등한시하는 일을 피하면서도 말이다. 반면에, 종말의 비극적 서사는 극단적으로 이원론적, 결정주의적, 재앙적이며, 역사적으로 자살, 살인, 심지어 종족살해적 광분의 형태로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
134쪽
로렌스(D. H. Lawrence 1885-1930) 작품은 환경의 주제와 종말론적 수사학의 결합을 보여 준다. 로렌스의 글이 델 이반 재닉(Del Ivan Janik)과 같은 심층생태학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재닉은 로렌스가 ‘인간은 유기적 우주의 한 부분이며, 그 우주의 경이로움을 인지하고 그것에 대해 자신의 의지를 억지로 행사하려는 유혹을 거부함으로써 삶을 가장 잘 영유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현대포스트휴머니스트 전통과 환경 의식(environmental consciousness) 문학의 시작점에 위치하고 있다’(Janik 1995: 107)고 주장한다.
136-137쪽
샤피로가 진술하듯이, 딕의 소설은 동물만이 아니라 인조인간에 의해 제기된 인간 정체성에 대한 도전을 탐색한다. 소설에서 복제물을 확인하기 위해 사용되는 표준적인 보이그트-캄프 테스트는 동물에 가해지는 피해를 상상하는 각본이 제시되었을 때 나타나는 공감적 반응을 측정한다. 동물의 고통에 반응하지 않으면 인조인간으로 확인되면서 퇴출이 합법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조인간이 너무도 인간 같아, 동물을 사랑하고 공감하는 인간적 특질에 대한 데커트 자신의 의식이 위협받게 된다.
211쪽
___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