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이라는 한국말을 완벽한 영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그나마 ‘원하고 열망하는 것을 채우지 못한 것’이라고는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어와 영어 두 나라 말에 능통한 일부 학자들이 한을 영어로 번역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그 번역들이 한국 사람들이 말하는 한의 뉘앙스와 같은 뜻은 아닌 것 같다. 로렐 캔달(Kendall 1988:8)은 한을 “충족시키지 못한 욕망”이라고 번역했고, 전혜성(1983:170)은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후회 같은 감정”이라고 정의했으며, 카터 에커트(Eckert 1990:400)는 “응어리와 분노를 유발하게끔 하는 원천”이라고 번역했다. 마이클 브린(Breen 2004:38)은 한의 뜻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기 위해 “일종의 순화된 열망과 절망이고, 그리고 잠재적으로 남아 있는 감정”이라 했다.
한풀이를 하려는 열망이야말로 한국 사람들이 단시일 안에 매사를 성취하게끔 한 원동력이 되었다. 즉,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굶주림과 가난을 탈피해야만 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의 물질적인 재화를 둘러싼 ‘한’은 경제적인 성취를 통해 풀렸다.
―‘1. 한국사람의 기질’ 중에서, 63쪽
‘정情’이나 ‘인정人情’이라는 한국말의 정확한 영어 번역은 ‘한’이나 ‘기분’이라는 말만큼 어렵거나 혹은 더 어렵다. 하지만 외국인이 이 말뜻을 한국 사람과 똑같은 정도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한국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갖는 따뜻하고 호의적인 감정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말의 원래 의미에 가장 근접한 단어를 찾아보았지만, 아직까지 적절한 말을 찾지 못했다. 한국에서 한국 학생들에게 한동안 영어를 가르친 일도 있는 다니엘 튜더(Tudor 2012)도 자신만의 번역을 찾는 대신 “사람들을 함께 끌어안을 수 있는 보이지 않는 포옹”, “서로 애정을 느끼고, 서로 걱정하고, 서로 뭉치고, 그리고 인간관계를 발전시키는 그런 느낌”이라는, 다른 사람들이 한 말들을 인용했다(Tudor 2012:93). 한국에서 여러 해를 산 어느 외국인이 말하기를 자신이 한국에 그토록 오래 살게 된 것은 한국 사람들의 ‘끈끈한’ 정에 끌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보이예 드 멘테(De Mente 2012:151)는 ‘정’이나 ‘인정’을 “개인적인 애착과 연민”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번역만 갖고는 뜻을 충분히 살릴 수 없다.
―‘1. 한국사람의 기질’ 중에서, 64~65쪽
역사를 통해 한국 사람들은 유교, 도교, 기독교, 불교, 민주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그리고 기타 외국의 사상, 이념, 종교, 그리고 철학 등을 받아들이는 데 훌륭한 학생이었다.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어 독립국가가 되었을 때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는 실험을 했다. 수십 년 전부터 한국은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이것은 한국의 공화 정치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처음으로 공화주의 정부를 세웠다. 1948년에 제정된 헌법은 민주주의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나서 한국은 12년간 이승만의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경험했으며, 이후 32년간의 군부 통치를 경험했다. 드디어 1993년이 되어서야 한국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 사회를 구가하게 되었다. 처음 민주주의 사상을 접한 후 민주주의 원칙을 말로, 그리고 행동으로 실현하는 데 거의 70여 년이 걸렸다.
만일 한국 사람들이 가혹한 군주제도, 식민지로서의 예속, 혹독한 독재정치, 비인간적인 군부통치 같은 여러 형태의 정치적인 이념과 제도를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한국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갖는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몰랐을 것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역사적인 형극의 경험과 기질로서의 ‘한’은 한국 사람들로 하여금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되게 만든 것 같다.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달성은 정치적인 진화와 정권 이양, 그리고 혁명 등을 통해 1945년부터 1993년까지 거의 반세기를 통해 이룩한 것이다.
― ‘4. 민주주의를 위한 긴 여정’ 중에서, 174쪽
역사적으로 보면, 세계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특정한 특권 계급은 결혼을 자신들의 신분을 유지하거나 상승시키는 주요도구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것은 조선시대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데, 양반 계급이 신분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중매결혼을 이용하면서 이는 이상적인 형태의 방법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했다. 결과적으로 조선시대의 중매결혼은 신분내혼제도身分內婚制度를 형성하는 데 공헌했고,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분 계급 내에서 끼리끼리 결혼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서민들 사이에서는 자유로운 혼인이 일반적이었다.
한국의 중매결혼은 한국 사회가 전근대 사회에서 현대 사회로 이행하면서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특정한 사회·경제적, 그리고 인구통계학적 변화는 중매결혼 형태의 과도기적 변화를 가져왔다. 한 개인이 배우자감을 여러 명 선택한 다음, 자신의 부모에게 그들 가운데 한 명을 고르도록 하거나, 부모나 친지가 여러 배우자감을 추천한 다음 결혼 당사자가 한 사람을 고르는 식이다. 오늘날 교육 정도가 낮고 시골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배우자를 중매결혼에 의지하여 선택하는 반면, 고등교육을 받고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배우자를 찾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지금도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한다거나 자신의 사회경제적 입지를 격상시키기 위하여 중매결혼을 하는 경우 또한 허다하다.
전통적인 중매결혼은 주로 친척, 특히 나이 지긋한 친척여성들이 자신의 친정쪽 사람을 자기 남편의 친척과 중매를 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짝지어진 신랑과 신부는 양가 부모의 허락을 받아 결혼한다. 이런 경우 대개 부모의 허락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양가의 어른들은 이미 중매인이 양가 모두의 인척관계로 맺어져 있어서 서로 잘 알기 때문이다(Kim 1974). 사실상 중매쟁이는 양가의 이중적인 구성원이 되므로 양가의 담보가 되는 셈이다. 또한 이러한 선택 과정 때문에 신랑과 신부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비슷한 계급에 속하게 된다. 조강희(1984)는 조선조 말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상북도 양반들의 통혼망通婚網에 대해 자세히 분석하였다. 그는 결혼의 범위는 약 30씨족이며, 같은 도道 안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 안에 살고 있고, 혼인은 친척, 친구, 그리고 주로 여성 구성원들을 동원하는 ‘연줄혼’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점증하는 도시화와 전통적인 중매결혼이 감소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도시에서는 일단의 유사전문 무면허 중매업자들이 나타났다. ‘마담 뚜’ 혹은 ‘뚜쟁이’라고 널리 알려진 사람들이 주로 신흥부자들과 특권층 자녀들을 중매했다. 중매쟁이인 마담 뚜들은 자신이 중신을 선 그 중매가 성공하여 결실을 맺기 전까지는 중매에 관한 수수료를 받지 않았다. 이러한 중매의 수수료는 약 1천 만원 정도였다. 그러나 때로는 그 수수료가 지나치게 비싸서 이는 곧 사회문제로 떠올랐다(Kim 1988a).
― ‘5. 한국의 결혼, 가족, 그리고 친족제도’ 중에서, 183~184쪽
요약하자면, 300개 이상의 상이한 종교가 공존하는 것으로 미루어 한국은 실로 다종교 국가이다. 일부 다종교 국가에서 타종교의 존재 자체를 없애려는 위협이 있는 것과는 달리, 한국에서 여러 종교 그룹들은 평화롭게 공존하며 심지어 다른 종교를 서로 존중하는 면모도 보인다. 한국 사람들은 종교적 포괄주의를 실천하며, 종교가 주는 이점이 하나 또는 다른 방식으로 모두에게 나타날 것으로 믿는다. 그렇기에 한국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종교는 다 선한 것이다.
종교는 한국 사람들의 영적인 충만함을 채워줬을 뿐만 아니라 한국 문화를 윤택하게 만들었다. 한국 사람들은 외래 종교와 함께 유입된 외국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이것을 우리 고유 문화에 접목시켜 한국의 것으로 만들었다. 나라가 외세의 위협에 당면했을 때에도 여러 종교 단체들은 서로 뭉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종교는 실로 한국에 크나큰 공헌을 했다.
― ‘7. 한국 사람들의 신앙과 종교’ 중에서, 274쪽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60여 년에 걸쳐 한국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장족의 발전을 했다. 한국은 1953년 당시 국민의 연평균소득GNI이 미화로 67달러인, 경제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였지만 2013년에는 연평균소득이 2만 6,205달러에 이르는 세계 15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60여 년 전 한국의 연평균소득은 에티오피아보다 낮았다. 사실 한국전쟁 중에는 에티오피아가 남한을 도와 공산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6,037명의 군인들을 한국에 파견해 주었다. 오늘날에는 전세가 역전되어 한국이 에티오피아에 다소의 원조를 제공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은 국제무역에서 전세계 7위의 규모를 자랑하며, 자동차 생산에서는 전세계 5위이다. 조선업과 LCD스크린 생산, 모바일 폰과 메모리 칩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선도자이며, 초고속 인터넷이 가장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나라이다. 또한 재벌기업 계열사 수 순위에서 전세계 8위에 올랐으며, 올림픽에서는 여러 종목의 메달을 획득하고 세계적인 골프 선수가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2012년 피어슨 교육 서비스에 의하면 한국은 교육의 질에 있어서 1위인 핀란드의 다음 순위를 차지하는 세계 정상급에 속한다. 세계 국제공항 1,700개 중에서 서울 인천국제공항이 지난 7년간 연속으로 세계 정상을 차지했다. 세계 기구인 세계은행 총재와 유엔사무총장이 한국 출신이며, 한국 가요와 한류는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한국은 개발원조위원회DAC로부터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이제 원조를 제공하는 국가가 되었다. 한국의 기적은 한국의 경이로운 경제발전을 이르는 표현인 ‘한강의 기적’에 그치지 않고, 군사독재정치에서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국가 20위를 차지한, 아시아에서는 가장 민주적인 국가로 기적적인 정치적 변신을 꾀한 나라”까지 포함한다(Tudor 2012:78).
― ‘9. 한국 경제의 기적: 원조수혜국에서 원조공여국으로’ 중에서, 304~305쪽
일부 한국 학자들은 많은 한국 사람들이 다문화주의라는 용어를 종족적, 그리고 인종적으로 다양화되어 가는 한국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그 의미를 남용하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다문화주의를 단일민족주의에 대한 반대 개념이나 대조적인 개념으로만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최근까지도 한국 사람들은 다문화주의에 따르는 복잡한 의미에 대해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영어의 접두사인 ‘multi’라는 말은 한국 사람과 다른 인종에 속하는 사람 사이의 국제결혼이 늘어나면서부터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그리고 ‘다문화가정multicultural family’이라는 말이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라는 말보다 먼저 사용되었다. ‘다문화가정’이라는 말로부터 ‘다문화주의’라는 단어가 파생되고 진화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다문화주의는 그저 한국 사람들과 결혼한 외국 사람들과 그 아이들만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비정부단체NGO에서 일하는 일부 사회운동가들을 제외하고는 한국의 일반 대중과 정부관료들 중에서 55만 7천 명의 합법, 불법을 막론한 모든 외국인 노동자들이 다문화나 다문화주의 정책에 의해 보호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한국에서 살고 있는 외국 사람들의 인권은 보호되어야만 한다는 것에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비록 한국 내에서 다문화주의에 대한 개념에 혼동이 있을지라도 한국의 다문화주의는 예로부터 종족적 민족주의와 동화정책을 강요했던 한국 사회로부터 벗어나 점차 서구의 진정한 다문화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한국 사람들은 다문화주의가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아직도 다문화주의가 소수민족 출신들이 한국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자신의 고유 문화를 지킬 권리까지 가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런 이유로 한국은 아직 다문화주의의 초기단계에 있는 것이다.
― ‘10. 문화적 모순’ 중에서, 347~348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