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황제皇帝와 나」라는 시로 당선했다. 1월 4일자 지상에 작품이 실리자 전국에서 편지가 답지했다. 뜻밖의 서신들이었다. 그 중 소포 하나가 배달되었다.
난생 처음 받아본 소포, 보낸 이의 함자銜字는 김광균金光均. 소포를 뜯어보니 고급 양장본의 『시집 와사등詩集瓦斯燈』이 나왔다. 시집의 저자 김광균이란 함자를 확인하는 순간 나는 먼 옛날인 듯 마음속에 무한한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시집에 편지 봉투가 끼워져 있었다. 봉하지 않은 봉투에서 뽑아 보니 만년필로 쓴 손글씨 편지로, 두 장에 이르는 장문이었다. 그 내용은 ‘우리 시단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요지의 격려의 글이었다. 나는 이 편지를 제일 먼저 서정주 선생님에게 보여 드렸다. 그리고 신촌 주변에 몰려 하숙하던 마산 출신 송상옥, 이제하, 강위석 등과 송수남 등의 친구들의 요청으로 이 편지를 건넸는데, 그 후 편지는 행방을 찾을 길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읽고 적어 보며 그렇게 암송하던 시 한 편 「설야雪夜」가 동動사진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속 표지에는 머리말에 해당하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와사등瓦斯燈에 처음 불이 켜진 것은 20년 전의 일이다. 떠나온 지 오랜 내 시의 산하山河 저쪽 일이라, 지금도 등불이 살아 있는지 이미 꺼진 지 오래인지 알 길이 없다.
--- p.13~14 「십 년 만에 부치는 글월」 중에서
“이제 내가 무슨 행복이 있겠는가/ 이 일밖에는/친구여 이 소식마저 없거든/다시는 나를 찾지 말게나.”
이 서시는 돌아가시기 16년 전의 시집 『우주는 내 마음에 있다』의 서문이다. 이 시집을 받아보면서 ‘아! 이 어른이 묘비명을 미리 써 놓은 것이구나’ 하는 예감을 받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 서시는 내가 시를 지어 시집으로 출판하는 일만이 행복이라는 말씀이다.
--- p.27 「후백后白 황금찬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중에서
회가 열린 명동 주변의 한식점에서 처음 만났다. 광수의 얼굴 표정은 졸리운 사람 같았다. 내가 나온 대광고등학교의 한참 후배였다. 내가 시집 출판을 축하한다는 인사말에 잠시 뜸을 드리더니 “선배님, 학교 선생님들이 하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시집에 미칠 광狂 자를 넣어 스스로 필명으로 사용했다.
그가 말한 ‘학교선생님’이란 작가 이범선 선생님을 말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 후 세간엔 19금급 음란물 수준의 작품을 계속 발표하며 사회적 풍속사범으로 쇠고랑을 차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의 근황이 한동안 뜸했다. 내가 시서화전을 준비하면서 마 교수에게 내 시에 삽화를 곁들인 서화를 부탁했더니 두 폭을 그려 보내왔다. 친필 서명한 『광마집』은 분실한 듯 찾지 못해 아쉽다. 대신 마 교수가 그려준 서화 한 폭을 보여 드린다.
--- p.64~65 「누가 마광수를 죽였는가」 중에서
김형, 놀라운 소식 하나 띄웁니다. 경기방송국에 근무하는 김예령 기자, 형의 첫째 따님의 이야기입니다. TV로 중계되는 회견장에서 김기자가 질문하는 장면을 보면서 아연 긴장했지요. 그런데 김기자가 당돌한 질문에 당황하는 대통령의 표정과 어투로 회견장이 술렁이는 장면이 벌어진 것이지요.“(특히 경제적 실정을 묻는 질문에 호도糊塗하는 답변에 대해) 그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그 근거는 무엇인지 좀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라고 일침을 가한 것입니다.
허언만 일삼던 대통령의 면전에서 들이댄 이 질문이 큰 화제 거리가 되었지요. 일부 언론기관이나 기자들을 ‘기레기’라고 조롱받는 시류에서 보면 모처럼 정곡을 찌르는 질문, 통쾌한 일격을 가한 셈이지요.
김형! 이 장면을 보면서 ‘부전여전’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네요.
--- p.34 「김광협 형, 만년필은 갖고 가셨나요?」 중에서
처음 문 목사님은 대학에서 구약학을 전공하는 학자요, 성서번역자, 나아가 서정시인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존경과 친애감으로 충만했지요.
그런데 어느 시기엔가 민주화를 위한 투사(?)로 변신, 북에 잠입해 김일성과 포옹하는 장면이 TV에 등장, 주한미군 철수 등을 부르짖는 영상, 이 장면이 저로 하여금 경기驚起를 일으키게 했습니다. 설마, 성직자의 볼셰비키 혁명이란 말인가
저는 이제 목사님에 대한 애증의 감정을 정리해야겠습니다. 어쨌건 저는 목사님을 속 깊이 사랑합니다. 『새삼스런 하루』에 담긴 육필서명 시집을 내 생애 끝날까지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내가 문익환 목사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70년 전후의 일이다. 재직하던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의 주보에 내 시를 가끔 게재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후 내가 옮겨간 고등학교에서 문 목사와 북간도 용정마을에서 유년 시절에 함께 놀았던 친구 김정우金楨宇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용정마을에서 윤동주도 같이 놀던 친구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또 한 가지, 문 목사님은 나의 고등학교 동기인 문영환 군의 맏형님이라는 사실도 후에 알게 된 것이다.
--- p.37~38 「애증의 무덤을 넘어」 중에서
나의 친구 김민부에 관한 잊히지 않는 기억은 그의 장례식장에서 본 참혹했던 광경이다. 얼굴에 화상을 입은 부인을 대신해 두 남매(?)가 영정 앞에 나란히 서서 조화를 단에 올려놓고 분향하는 장면에서 나는 “흑-”하고 옆 사람들이 들을 정도 흐느낀 것이다. 나도 모르게 격한 연민의 감정이 폭발했던 것이다. 천진난만해 보이는 어린 자식들의 등장이 순간적으로 너무나 애처롭게 느껴졌던 탓이었다. 그는 문화촌(갈현동)에 살았다. 집에서 가까운 적십자병원(서대문)에서 장례식을 치른 것이다.
나는 1958년 서라벌예대(2년제) 문예창작과에 들어가 민부를 처음 만났다. 이미 그는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시인이었다. 그 해 여름방학에 나는 민부와 같이 부산에서 온 권영근 군의 초대를 받아 부산으로 갔다. 초량의 철길 주변에 있었던 집(두 친구 중 누구네 집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음)에서 일박하고 역시 동기생이었던 송상옥 군이 사는 마산으로 이동했었다. 앞에 거명한 세 친구 중 권영근 군은 분당에 살고 있을 때 한두 번 만났으나 지금은 소식이 없다.
김민부를 천재 시인이라고 칭하는 것은 고교 시절에 여러 콩쿨에서 입상한 경력이 화려했기 때문이다. 고교 시절 부산의 한글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는데, 심사위원 유치환, 김춘수 시인은 김민부의 시 「아침」에 대한 선후평에서 “상상력의 풍부함과 언어 감각의 예민함을 단번에 짐작케 한다. 상想과 언어가 정렬되어 있는 품이 고교생답지 않은 느낌”이라고 썼다.
--- p.113~114 「일출봉에서 하늘나라로 사라지다」 중에서
언젠가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선생님을 모시고 학교 앞의 다방에 들러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한 학생이 현장에 없는 어느 학우의 잘못을 얘기하는 것을 들으시고는, 정색을 하시고 “내 앞에서는 남을 흉보지 마라. 내 앞에선 남을 욕하지 말라”고 훈계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순간 좌중은 찬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 p.145 「내 앞에선 남을 흉보지 마라」 중에서
30년 전 오규원吳圭原(圭沃) 사백이 부친 편지를 최근에야 뜯어보았다. 봉투에는 ‘1990. 1. 5 서울 영동’이라는 일부인日附印이 선명히 찍혀 있다. 나는 해마다 받은 편지나 엽서류의 우편물을 연도 표시를 해 한 묶음씩 묶어 보관해두곤 했는데,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서재 정리를 시작했다. 그동안 마음으로만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가 실천에 옮긴 것이다. 일기장, 수첩, 우편물 등을 정리하다 보니 오규원 형의 뜯지 않은 편지가 다른 편지들과 함께 묶여 있는 것이 아닌가. 사소한 부주의로 미처 뜯지 않은 채 넣어둔 것이다.
“얼굴 본 지 너무 오래 되었다./ 항상 즐거운 일이 주변에서까지/ 계속 있기를 빌겠다.”
오규원(1990년 1월 5일자 소인이 찍힌 봉투. 엽서 크기의 그림과 친필 연하장이 들어 있었다.)
형은 이미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연하장 봉투에는 이름만 적었을 뿐 집 주소는 적혀 있지 않았다. 뒤늦은 내 답신은 어디로 띄워야 할지?
--- p.249 「허무주의자 오규원의 시적詩的 패러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