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아시겠는가. 박공. 내가 왜 이 새집을 허물어뜨리려 하는지 그 이유를 아시겠는가. 그렇소이다. 내게 있어 이 집은 새 집이 아니라 바로 공중에 떠 있는 누각인 것이외다. 하늘에 떠 있는 신기루인 것이외다.'
--- p.199
스스로 상계에서 물러나 가객이 됨으로써 금강사에서 새벽 종소리를 들었을 때 깨달았던 길 없는 길의 세 번째 길을 완성한 임상옥은 자신이 자서한 <가포집> 서문에서 자신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꾼 '계영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나를 낳아준 사람은 부모이지만 나를 이루게 해준 것은 그 하나의 잔이었다 (生我者父母 成我者一杯)'
그렇다. 그 술잔, 계영배는 임상옥을 거상에서 거인으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이때의 심경을 임상옥은 <가포집> 서문에 담담한 필치로 간단하게 표현하고 있다. '...새 집을 짓고 입주하여 들어오매, 숲과 연못, 꽃과 돌 사이에 새들이 날아와 다투어 집을 지으며 지저귄다. 가히 책을 읽고 시를 지으면서 만년에 휴식을 취할 장소가 될 만하다.'
--- p.262
송이는 방안에서 떠나는 임상옥의 목소리와 발자국 소리와 양어미 산홍의 호들갑스런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송이는 숨죽여 듣고 있었다. 자칫 통곡으로 터져 흐르려는 눈물을 막기 위해서
송이는 입안에 가득 숨을 베어물고 있었다. 가신다. 임께서 떠나가신다. 떠나가시오면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신다. 아아, 날더러 어찌 살라시고 나를 버리고 떠나가신다.마침내 임상옥이 문 밖으로 나아가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 가자 송이는 노리개로 차고 있던 칼집 속에서 날카로운 은장도를 빼어들었다. 은장도. 송이가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 항상 옷고름에 차고 다니던 패도. 그러나 이제 정절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송이는 칼집에서 날카로운 칼을 빼어들고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유시사에는 상대를 공격하거나, 마지막으로는 자결하기 위해서 갖고 다니던 칼이 아니었던가. 허공으로 치켜들었던 은장도를 송이는 순간 내리찍었다.
송이의 손에서 은장도는 춤추었다. 베틀 위에 거의 완성되어 가던 명주옷의 실을 은장도는 단숨에 베어내었다. 임이 오시면 만들어 주리라 일년여 동안 직접 짜던 명주옷이었다. 그러나 이제 떠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임을 위해 옷감을 짜서 무엇하며, 옷을 지어 무엇할 것인가. 임은 떠났다. 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송이는 베틀에 걸려 있는 명주옷을 은장도로 갈갈이 찢어내리면서 무너졌다. 마침내 참았던 울음이 통곡이 되어 터져 흘렀다. 날더러는 어찌 살라 하시고 나를 버리고 떠나시고 말았다.
--- pp.249-250
동이 트기 전에 임상옥과 송이는 곽산을 떠나 가산으로 출발하였다. 임상옥은 말을 타고 떠났으나 송이는 교부들이 맨 가마를 타고 떠났다. 간밤에 이른대로 송이는 흰 상복을 입지 아니하였으나 삼베로 만든 최를 양쪽 가슴에 매달았으며 백댕기라 하여서 삼베로 만든 헝겊으로 머리를 묶고 있었다.
예로부터 '2월 한식에는 꽃이 피어도 3월 한식에는 꽃이 피지 않는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었다. 2월에 한식이 드는 해는 철이 이르고, 3월에 드는 해는 철이 늦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산을 찾아가는 길 양옆에는 유난히 철이 이른 탓인지 흐드러지게 봄꽃이 피고 있었다.
가산은 곽산보다 남쪽에 있었고, 청천강과 대령강의 두 강줄기가 합쳐지는 그 어귀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한촌이었다. 길은 멀지 않았지만 주위에 첩첩한 산이 많아 가고 오기가 수월치 않았다.
해가 있는 동안에 성묘를 마치고, 해거름까지는 곽산으로 돌아와야 했으므로 임상옥은 인부들을 재촉하여 서둘러 길을 가도록 명령하였다. 임상옥은 20여 년 만에 가산으로 이희저의 무덤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임상옥은 종자가 이끄는 대로 말을 타고 가면서도 줄곧 마음이 착잡하였다. 남의 눈을 피해 매장을 하였으니 묘비는 물론 봉분조차도 제대로 세우지 못하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하였는데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강산이 두 번 이상 변하였으므로 20여 년 전에 묻었던 이희저의 묘자리를 어떻게 쉽사리 찾아낼 수 있으리오.
---pp.221~222
곽산에서 돌아온 임상옥은 즉시 금강사에서 새벽 종소리를 들었을 때 깨달았던 길 없는 길 중에서 그 세 번째의 길을 실행에 옮길 것을 결심하였다. 이미 스스로 지은 집을 파기하는 것으로 그 첫 번째의 길을 실천하였던 임상옥은 사랑하는 송이와의 인연을 끊고 이별함으로써 두 번째의 길 없는 길을 행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세 번째의 길이었다.임상옥은 조촐한 주안상을 차린 후 박종일을 불러들여 단둘이 마주앉았다. 주거니 받거니 몇 순배의 술잔이 오간 뒤 임상옥이 먼저 입을 열어 말하였다.
--- p.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