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이미 경고를 했고 기회도 여러 번 줬어. 하지만 너희들은 그걸 스스로 걷어찼어. 이제 마지막 기회를 줄 거야. 너희 둘이 친구 보고서를 쓰는 거다.” 친구 보고서라는 말은 활이 되어 내 가슴을 관통했다. 나는 순간 숨이 멎었고 눈을 깜빡일 수도 없었다. 그 보고서는 애들 사이에서 ‘문제아 보고서’라고 불렸다. 학교에서 특정한 아이를 괴롭히는 애를 교화하기 위해 만든 프로그램이었는데, 괴롭히던 애와 괴롭힘을 받던 애를 단짝처럼 붙어 다니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억지로 상황을 만들어 놓으면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고 했다. 그 프로그램이 효과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지만 일단 그 보고서를 쓴다는 것 자체가 수치였다. 문제아 보고서는 정말 문제 있는 애들만 썼다. (중략) 나한테 문제아라고 말하던 녀석이 문제아 보고서를 쓰게 되다니 정말 고소했다. 기민이는 분명 자존심이 엄청 상했을 것이다. 우리는 악수를 했다. 선생님이 어깨동무를 하고 교실까지 가라고 했다. 나는 기민이와 어깨동무를 하고 교무실을 나왔다. 그런데 문을 닫자마자 기민이가 내 어깨에서 팔을 확 빼더니 쌩 걸어갔다. -- pp.17-21
“똑똑하네. 너는 백순이 좀 닮아라.” 녀석의 말투가 영 거슬렸지만 백순이라면 비교를 당해도 괜찮았다. 백순이는 정말 똑똑했다. “백순이가 새끼 낳는 거 재작년에 딱 한 번 봤는데 새끼들 엄청 작고 진짜 귀여워. 눈도 못 뜨고 낑낑거려.” “나도 새끼 낳는 거 한번 보고 싶어.” “우리 백순이 새끼 낳을 때 보러 와.” (중략) 기민이가 번호를 쓰는 동안 나도 긴 돌을 하나 주워서 벽에 낙서를 했다. 조현민, 바보 멍청이 찐따. 형 욕도 써 놓고 얼굴도 못생기게 그렸다. 번호를 다 쓴 기민이가 그걸 보더니 몇 걸음 옆으로 가서 그림을 그렸다. 개와 토끼였는데 개 옆에는 백순이라고 썼고 토끼 옆에는 토끼굴이라고 썼다. 우리는 경쟁하듯 벽에 많은 그림을 그렸다.-- pp.94-95
기민이와 현섭이는 반에서 알아주는 앙숙 관계다. 학기 초, 사소한 장난이 계기가 되어 지금은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것이다. 툭하면 신경전에 주먹다짐까지 불사하던 두 아이는 결국 선생님의 명으로 ‘친구 보고서’를 쓰게 된다. 매일 점심을 같이 먹어야 하고, 일주일에 각각 한 번씩 서로의 집을 방문해 두 시간을 보낸 다음 방학 전날에 보고서를 제출해야만 한다. 마지못해 이 일을 받아들인 두 아이는 시종일관 실랑이를 벌이며 함께 시간을 보낸다. 불량한 형들로부터 달아나기도 하고, 자기들을 위기 상황으로 몰아넣은 스파이를 찾기도 하며, 토끼굴에서 추억을 쌓기도 하는 등 조금씩 추억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렇게나 싫어하고 미워하던 서로를 ‘친구’로 받아들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