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600년 옛 지도가 펼쳐진다
순성 중 어디가 가장 좋았냐고 묻는다면: 낙산 눈을 부릅뜨고 본다면야 창덕궁의 푸른 기와 하나쯤이야 안 보일까 싶지만, 이곳이 옛 서울 ‘한양’이었음을 떠올릴 만한 풍경 하나 찾는 게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도시로서 무언가가 느껴졌다면, 아마도 눈앞에 보이는 울창한 숲속에 창덕궁의 아름다운 후원과 종묘의 정전이 자리하고 있고, 저기 수많은 빌딩 사이로 여전히 옛길과 옛 물길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배웠고, 경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낙산에 올라 내려다보면」중에서
한양의 북동문, 혜화문 문루에 서서: 혜화동
문루를 갖추게 된 혜화문은 순조 16년 다시 한번 보수되지만, 다른 성문들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이후 방치되면서 훼철의 수순을 밟게 됩니다. 1928년, 부서진 문루는 보수할 자금이 없다는 이유로 먼저 철거되고, 그 후 도로 개설과 돈암동행 전차 부설을 위해 성벽이 잘려나가면서 1938년에는 남아 있던 홍예마저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전차 선로가 놓이고, 도로 확장을 위해 깎여나간 고갯마루는 혜화문 주변의 풍경을 크게 바꿔놓았지요. 그것이 1994년 혜화문이 다시 세워질 때, 원래 위치에 복원되지 못하고 북쪽으로 다소 옮겨져 높다란 축대 위에 자리하게 된 이유였습니다.
---「혜화문 너머 다시 풍경 속으로」중에서
서울에서 가장 먼저 봄볕이 드는 곳: 남산
쉴 새 없이 오가는 자동차 사이로 우뚝 솟은 빌딩들 아래로 길은 이어지고 끊어지고 다시 이어집니다. 인왕산에서 백악산으로, 다시 낙산에서 남산으로…. 그리고 다시 이 자리로 와서 지나간 도시의 흔적들을, 지나온 도시의 풍경들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습니다. ‘600년 역사를 가로지른다’는 그 흔해 빠진 말의 의미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하나의 선으로 옳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눈앞에 옛 지도가 펼쳐진다」중에서
황폐한 성곽을 비추는 것은: 숭례문
성벽처리위원회가 조직되고 일 년 남짓한 기간 동안 훼철된 성벽의 규모는 소의문 부근의 성벽 77간, 숭례문 부근 성벽 77간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초반에 소의문과 돈의문은 흔적도 없이 헐렸고, 거기서 나온 목재나 석재들은 여기저기로 팔려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당시 삼문 안팎의 변화는 컸고, 그 이후로도 한양도성의 훼철은 매우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네모반듯한 돌들 아래로 유난히 거칠고 짙은 옛 돌들이 군데군데 남아 있습니다. 처음 쌓았던 돌들은 허물어지고, 고쳐 쌓은 돌들도 어딘가로 옮겨져 이렇게만 남게 되었을 것입니다.
---「한양도성, 훼철의 시간들」중에서
고갯마루 넘어 다다른 동네: 부암동 일대
흥선대원군의 별서로 알려진 석파정은 원래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의 소유였습니다. 그의 별서는 바로 옆 바위에 반듯한 필체로 새겨진 ‘삼계동’ 각자로 인해 ‘삼계동정사’로 불렸습니다. 넓은 암반 아래로 흐르는 계류, 그윽한 숲속, 아름답고 기품 넘치는 옛집, 거기에 한양도성이 내리꽂히며 백악의 절경이 손에 잡힐 듯 전개되는 이곳을 흥선대원군도 어지간히 마음에 들어 했었나 봅니다.
---「부암동 봄 마실」중에서
‘의’를 세우고 역사를 씻어 보내다: 세검정
세점정 계곡은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할 때 ‘세초洗草’를 하던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세초란 실록이 완성된 후에 중요한 기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편찬에 사용된 각종 자료를 물로 씻어내는 과정을 말합니다. ‘한지를 어떻게 물로 씻어내? 흐물흐물해지잖아!’ 하며 가졌던 순박한 의문은 종이를 제조하는 관청이었던 인근의 ‘조지서造紙署’로 물에 잘게 잘게 찢긴 먹물 빠진 종이를 보내 재활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말끔히 해소되었지요. 그러니 맑은 물이 흐르고, 종이를 펼쳐놓기 좋은 널찍한 바위가 많았던 세검정 일대는 세초의 장소로도, 일찍부터 조지서가 위치하는 데도 아주 안성맞춤인 곳이었습니다.
---「자문 밖 물길 따라 추억은 방울방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