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폭하기로 소문난 슈프랑가 산맥의 금색 오우거들이 보기 드물게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드래곤이라도 앞에 둔 것처럼 겁에 질려 있지만 실상 그들의 앞에 서 있는 건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작은 여성과 조그만 여자아이. 단 둘뿐이다. “리피, 저 돈 덩어리들을 어서 잡아버리고 돌아가자. 안 그러면 네 아버지가 또 울면서 달려올 거야.” “어머니, 이번엔 무슨 마법을 쓸까요?” “화염 마법은 불이 날지도 모르니 제일 잘 쓰는 바람으로 하자꾸나. 세 개만 날리면 뒤처리는 이 어머니가 하마.” 환하게 웃으며 어린 딸에게 사용할 마법을 가르쳐준 뒤 샤이 아스는 가볍게 지팡이를 휘둘러 마법을 준비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온 슈프랑가에서 너무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지금쯤 하던 연구를 다 끝낸 남편이 산 아래에서 눈이 빠지도록 모녀를 기다릴 것이었다. 어린 딸은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더니 금방 거대한 바람의 창을 만들어내어 사뿐하게 던졌다. 금색 오우거들은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르며 필사적으로 도망쳤지만 결국은 바람의 창에 다리를 맞아 넘어졌고 곧 날아오는 거대한 돌에 맞아 이 세상을 고이 하직했다. “리피, 아가야. 넌 내 딸이지만 정말 못하는 게 없네. 엄마는 너무 기쁘다.” 승리의 포즈를 취하는 어린 딸을 달랑 안아 들고 그녀는 뽀뽀를 해주었다. 자신을 꼭 닮은 자랑스러운 딸. 뛰어난 마법 실력도 그대로 물려받아 이렇게 작은데도 가르쳐주는 족족 마법을 성공시켰다. 포동포동한 뺨과 귀여운 미소가 참 예쁜 아이었다. 나풀거리는 갈색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생기 있어 보이는 갈색 눈동자가 데구르르 구르는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딸인 리피 아스는 정말 샤이 아스의 판박이였다. 그리고 그녀의 운명까지도 그대로 닮아버렸다. “어머니, 갈 시간이에요.” 폴짝 뛰어내려 오우거들의 뒤에 곱게 피어 있던 꽃을 주섬주섬 끊어 주머니에 담은 리피가 그녀의 손을 한번 잡았다가 놓았다. 그리고 아이의 목에 걸려 있는 금빛 목걸이에서 놀라울 만큼 거대한 마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샤이 아스에게도 몹시 익숙한 진이 등장하면서 어린 그녀의 딸 주위를 서서히 감쌌다. 최대한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는 작게 손을 흔들었다. 주먹을 꼭 쥐고 눈을 감는 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오늘도 목걸이는 그 옛날과 똑같이 계약자를 소환해 가버렸다. “부디 이번에는 실마리를 찾기를.”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아마 이번에도 실패일 가능성이 높지만. 자신의 어린 딸이 실망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녀, 샤이 아스는 기도했다. 저 빌어먹을 목걸이의 계약이 풀리게 해달라고.
◇ ◆ ◇
환하게 빛나는 목걸이에서 익숙한 진이 형성되었고 곧 텔레포트 기능이 발동되었다. 눈을 감았다 흐르는 마나의 움직임이 멈추자 살며시 떠보았다. 예상대로 내 앞에는 파란 머리에 초록색 눈을 가진 천사 같은 아이가 웃으며 서 있었다. “어서 와, 리피. 이번에는 어디 다녀왔어?” 귀엽다. 너무너무 귀엽다. 나와 동갑이자 어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길고 긴 저주인 목걸이의 계약자인 티셀리온 황태자는 황가의 미모를 그대로 물려받아 무척 사랑스러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성격도 착해서 누구에게나 상냥했고 흔히 말하는 예쁜 아이의 표준을 달리고 있는 중이다. “슈프랑가 산맥에 다녀왔어요. 어머니와 같이 금색 오우거를 잡았답니다. 마법사의 탑에서 기뻐할 거예요.” 내 나이 다섯 살. 하지만 500년 동안이나 지긋지긋한 계약이 묶여 있는 아스 가의 핏줄이라 그런지 대대로 우리 집안은 정신적 성장이 빨랐다. 그리고 어머니의 뛰어난 친화력을 물려받은 나는 이미 중급정령을 부릴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아직 어려서 마나가 그리 많지 않으므로 지속시간이 짧다는 한계가 있지만 말이다. “슈프랑가 산맥…….” 티온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이윽고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조곤조곤 귓가에 울려 퍼졌다. “금색 오우거는 B급 용병 다섯 명이 투입되어야 잡을 수 있는 몬스터잖아. 위험하다고.” 초록색의 눈망울이 상냥하게 빛나고 다정한 목소리가 나를 걱정해준다. 아, 역시 귀엽다! 심정은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 빚을 갚으려면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게 세상의 이치.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괜찮아요. 전 어머니랑 같이 다녀서 강한걸요. 마법도 쓸 줄 알고요. 몸은 좀 둔하지만 아티팩트로 보충하니까, 위험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렇게 한 달에 한 번씩 전하의 옆으로 텔레포트 되잖아요. 세상 어디에 있더라도.” 목걸이의 계약은 정말 강력하다. 한 달에 한 번씩 지정된 날에는 무조건 아스 가의 계약자를 빚을 갚아야 하는 계약자에게로 텔레포트 시킨다. 결계가 쳐진 황궁이나 신전이라도 가리지 않는다. 이건 엄청나게 복잡한 고도의 마법 덕분인데 약 500년 전 조상들이 계약할 때 공증인이 된 드래곤이 직접 마법을 걸어서 그렇단다. 중심에 박혀 있는 보석은 드래곤의 피가 담겨 있어 거의 무한한 마력을 공급한다. 덕분에 대륙의 끝과 끝이라도 한 번에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것보다도 얼른 꽃을 받으세요. 전 라이트닝 볼트에 또 맞는 건 정말 사양이라고요.” 내 다급한 재촉에 티온은 급히 꽃을 받아 들었다. 위에서 설명한 텔레포트 기능 외에도 망할 목걸이에는 다양한 다중마법이 중첩되어서 걸려 있다. 역대 계약자들이 긴 시간 동안 끈질기게 연구한 결과 알게 된 마법이 대략 스무 가지 정도. 그중 가장 골치 아픈 마법은 텔레포트 된 지 삼십 분 안에 빚을 갚지 않으면 아스 가의 계약자에게 라이트닝 볼트가 죽지 않을 정도로 시전된다는 것이다. 보호마법을 걸어도 소용없다. 순식간에 해제시켜버리고 파지지직, 그대로 시전이다. 그래서 물건이든, 행동이든 어떤 형태로든 아스 가의 사람은 빚을 갚아야 한다. 전기 통구이가 되고 싶지 않다면. “응. 예쁜 꽃을 받았어.” 받은 사람이 확실하게 목걸이에 언령을 입력시켜야 라이트닝 볼트 마법이 취소가 된다. 다행이 이번에도 무사히 번개에 맞지 않고 끝이 났다. 매번 겪는 일이지만 정말 조마조마하다. 더 어릴 때 실수로 언령을 말하지 않고 있다가 한번 라이트닝 볼트를 맞은 적이 있었다. 정말 말도 못하게 아팠다. 그 뒤로는 둘 다 무조건 만나면 언령부터 입력시키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가을 오크 오기 전, 여름에 성벽을 쌓자.’라는 말처럼 미리 대비를 하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에휴, 이번에도 무사히 끝났네요. 전하. 다음 달에 생일이 있으시죠? 뭐 받고 싶은 거 있으세요? 제가 드릴 수 있는 거라면 다음번에는 그걸로 가져올게요.” 그러자 큰 눈을 도록도록 굴리던 티온이 조금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우웅……. 별로 필요한 건 없는데?” 대충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이 대답이 나와서 난 몹시 슬퍼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이도가 너무 높다.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공작가에 빚을 갚았던 자신이 황가에 빚을 갚는 나보다는 훨씬 나았다고 하셨다. 500년 아스 가 역사상 내가 가장 불행한 계약자일지도 모른다. 하필이면 그냥 황가의 인물도 아니고 황태자라니. 도대체 이 아이에게 뭐가 부족한 것이 있다는 걸까? 답이 안 나온다. 답이 안 나와. 오늘도 역시 이 말은 해야겠다. 이 망할 목걸이 같으니라고! 망할 목걸이! 빌어먹을 목걸이! 개똥같은 목걸이! 아, 속이 조금은 시원해진다. 거대한 마나가 주위로 몰려드는 걸 보니 슬슬 떠날 시간이 다 되었다. “전하, 그 꽃, 푸스테 전의 할아버지에게 보여드리면 좋아하실 거예요. 약초거든요. 하지만 차로 우려서 먹으면 더 맛있어요. 그러니까 꼭 우려서 드세요! 전 이만 가볼게요. 슬슬 갈 시간이니까요.” 목걸이의 기능 중 유일하게 내가 좋아하는 기능이 바로 이것이다. 빚을 받은 사람이 특별한 언령을 구사하지 않으면 한 시간 뒤 다시 텔레포트 기능이 작동해 본래 있던 곳으로 나를 옮겨준다. 한마디로 가는 길 오는 길 책임지는 기능이 붙어 있는 것이다. 오는 거야 그렇다 쳐도 돌아가는 건 장난이 아닌지라 정말 이거 하나만큼은 감사하다고 여기고 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 목걸이를 만든 드래곤에게. 우리 부모님은 보통 대륙을 돌아다니시기 때문에 수도에 있는 경우가 거의 없거든. 올 때와 같은 거대한 진이 내 주위에 둘러졌다. 정말 가야 할 시간이다. “안녕, 전하. 다음번에도 정원에서 만나요. 연회장 중간에 떡 소환되면 큰일 나니까 잊으면 안 돼요.” “응, 살짝 빠져나올게. 잘 가, 리피.” 시야를 가득 메우는 눈부신 빛을 보며 난 눈을 감았다. 내 주위를 폭풍처럼 휘감고 있는 마나가 날 슈프랑가 산맥으로 다시 옮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