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알겠는가, 내가 그 애에게 누구였는지, 내가 얼마나 사랑에 넘쳐 그 애를 어루만지고 돌보았는지. (…)얼마나 완벽하게 그 애를 소유했는지, 한때 그 애가 얼마나 완벽하게 나의 것이었는지, 한때 내가 얼마나 충만하게 그 애의 모든 것이었는지. 이게 바로 심술궂은 시간이다. 시간이란, 그런 것이다.” --- p.34~35
“나는 그 애에게 말한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 책이 아니라 바로 그 애라고, 우리라고, 이제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 순간이라고, 우리가 이제 더이상 하지 않을 모든 것들이라고, 자라면서 그 애가 내지 않게 된 짜증이고, 우리가 더이상 하지 않게 된 다툼이라고. 나는 또 그 애 귀에는 들리지 않는 말들을 혼자 중얼거린다. 어쨌든 난 그 애에게 직접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행복을 잃어버린 줄 알았다고.” --- p.50~51
“솔직하게 말해서 이제까지 내가 해온 것은 내 삶을 사건 속으로 몰아넣기가 아니었던가? 사건들이 닥치고, 시간이 동요된 채 지나가고, 소리 나야 할 것이 소리 나고, 시간, 내 은밀한 적, 그 시간을 내가 보지 못하는 사이에 지나가버리게 한 것뿐이 아니었던가?” --- p.52~53
“나는 생각한다. 여든세 살이 된 노인이 어째서 미술 카탈로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 죽음에 가까운 그 시기는 예술이니 문화니 하는 인간의 가식과 끝장을 낼 때 아닌가? 나는 생각했다. 여든세 살이라면 그런 것들로부터 배워야 할 바를 이미 배운 나이 아닌가. 진실이 그런 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간은 사는 것보다 꿈꾸는 데 더 유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조제프 H.의 어머니에게 완전히 공감하면서 생각했다. 그런 것들은 기껏해야 우리가 시간의 강을 건너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닌가.” --- p.92
“그 애는 웃고 있다. 그 애는 여덟 살이다. 이보다 더 눈부신 행복을 드러내기란 어려울 것 같다. 알타는 기쁨에 가득차서 온 이를 다 드러내며, 아니 ‘앞니가 모두 빠진 빈 공간’을 드러내며 활짝 웃는다. 내가 쓰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것, 앞니 빠진 소녀의 기막히게 매력적인 미소다. 그 애의 벌린 입속에 젖니들과 구멍, 이제 막 나오기 시작하는 치아, 막 비집고 올라오는 톱니모양의 어금니가 보인다. 심미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보다 흉한 미소도 없으리라. 하지만 그 애는 앞으로 이보다 더 멋진 미소를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 p.98~99
“제가 보는 건 사람들이 아니라 배경이 되는 풍경이에요. 저는 인간들의 비극에는 관심이 없어요.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그 뒤의 산들, 그 뒤의 광채예요. 사람 너머의 배경에 주목하면, 시간이 팽창되죠. 옛날에도 바로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어째서 오늘날 사람들이 죽는 게 더 중요한 거죠?” --- p.129
“지독한 선망을 불러일으키는 그들의 의식화된 삶 속에는 무엇인가가 있다. 욕망에 넘치는 바깥세상과의 모든 관계를 단호히 끊고―자신들이 무릎 꿇는 제단을 바로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안다―, 시간의 주인이자 노예로서 자신들만이 진 멍에를 세상에 공표한 사람들, 시간을 자신들 방식대로 재단하는, 내가 알지 못할 곳으로 가는 그 믿음의 사람들은 현재를 유예하지 않는다. 기다림이라는, 우리의 딱한 고통에서 벗어나 있다.” --- p.157~158
“공간과 공간이 있다. 아름다운 장소, 유명한 장소, 몹시 추한 장소 들에 결국 우리는 무심해진다. 그런 장소들은 기껏해야 딱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문화적인 성향에 호소할 뿐이다. 진짜 공간, 우리를 만들어낸 공간, 기억을 품은 공간은 우리가 자신 너머에 있는 것을 본 그런 장소들이다. 우리의 과도함, 우리 욕망의 두려움과 맹세를 중재하는 곳들이다. 다시 말해서 삶의 전복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 말이다.” --- p.170
“나는 이내 이런 생각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 대신 여행 중에 줄곧 머릿속에 맴돌던 것들에 대한 생각으로 돌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자기 밖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자기 밖에 있는 것은 세상의 환영일 뿐 세상이 아니다. 나는 내가 글로 쓸 수 없는 것을, 내가 알려줄 수 없는 그런 것을 생각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낯설게 만들 재능을 갖고 있지 못한 게 아닐까. 어두운 채로 남아 있어야 하는 영역이 있다. 모호한 것도, 미지의 것도 아닌, 그저 언어의 눈부신 빛만은 닿지 말아야 할 그런 곳이.”
--- p.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