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래, 너는 벌써 집으로 다시 돌아갈 궁리를 하는 모양이구나.」요아힘이 대답했다.「좀 기다려 봐, 너는 이제 막 도착했잖아. 물론 여기 산 위의 우리들에게 3주란 아무것도 아닌 셈이야. 하지만 이곳에 찾아와서 3주간만 머물겠다는 너에게는 꽤 긴 시간이겠지. 무엇보다 먼저 이곳 기후에 적응해야 하는데, 그게 결코 쉽지 않아. 이제 알게 될 거야. 우리들에게 별난 것은 기후뿐만이 아니야. 넌 이곳에서 여러 가지 새로운 것을 알게 될 거야. 주의해서 지켜보라고! 그리고 너는 내 얘기를 했는데, 그것도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야. 〈3주 후에 집으로 간다〉는 말은 저 아래 세상의 생각이야. 물론 나는 얼굴이 검게 탔어. 하지만 이것은 주로 눈에 그을려서이고, 베렌스가 늘 말하듯 별로 대수로운 일은 아니야. 지난번에 실시한 종합 검진에서 베렌스는 앞으로 반년은 족히 걸릴 거라고 말했어.」
「앞으로 반년이라고? 너 돌았어?」한스 카스토르프가 소리쳤다.
(상) 본문 20~21면
「34호실이군요.」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특유의 꽥꽥거리는 소리로 말했다.「틀림없군요. 댁이 감기에 걸렸다면서요?」이 말을 그녀는 처음에는 프랑스어로, 그다음에는 영어와 러시아어로, 맨 마지막에는 독일어로 말했다.「어느 나라 말로 해야 하나요? 독일어로 해야겠지요. 아, 젊은 침센의 손님이지요, 이미 알고 있어요. 나는 수술실에 가봐야 해요. 클로로포름으로 마취를 해야 할 사람이 있어요. 콩 샐러드를 먹은 환자예요. 정말 잠시도 한눈을 팔 수가 없어요……. 그런데 댁은, 여기에서 감기에 걸렸다는 것이지요?」
(상) 본문 321면
한스 카스토르프는 눈(雪)을 잔뜩 묻힌 두 다리로, 어딘지 모를 흐릿한 산꼭대기를 향해 점점 더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이불을 깔아 놓은 것 같은 그 산꼭대기는 테라스를 이루며 계단식으로 조금씩 높아져 갔는데, 어디로 올라가는지,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었다. 산의 위쪽은 안개처럼 흰 하늘과 맞닿아 있어서 어디서부터가 하늘인지 전혀 분간할 수 없었다. 산봉우리와 산등성이도 보이지 않았고, 모두가 희미한 무(無)이며, 한스 카스토르프는 이 안개에 덮인 무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 있는 세계, 즉 사람 사는 골짜기도 눈 깜짝할 사이에 닫히고 시야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그곳에선 이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고독감, 아니 버림받은 느낌이 더 어울리는 외로움은 부지불식간에 더 이상 바랄 수 없을 정도의 깊이가 되어 공포를 느낄 정도까지 되었다. 이 공포야말로 용기의 원천이었다. …… 그는 계속해서 위로,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중) 본문 443~444면
한스 카스토르프는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무시무시하고 사악한 것, 악마적인 것밖에 없었다. 그는 눈에 보이는 이 현상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시간을 망각한 생활, 아무런 걱정도 희망도 없는 생활, 겉으로는 분주한 것 같지만 속으로는 정체되어 있는 무절제한 생활, 죽어 있는 생활이었다.
(하) 본문 272면
10분 후에 박사는 세 여자를 동반하고 옆방에서 돌아왔다. 엘렌 소녀의 겉모습이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원래 입던 자기 옷이 아니라 교령(交靈)용 의상, 즉 일종의 모임용 의상이라 할 수 있는 하얀 생사(生絲)로 짠 잠옷 같은 옷을 입고, 허리에는 노끈처럼 보이는 허리띠를 두른 채 가느다란 두 팔을 하얗게 드러내고 있었다. 처녀다운 가슴의 곡선이 옷감에 부드럽고 선연하게 드러나 있는 걸 보면, 옷 속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모두들 흥분하여 활기차게 그녀를 맞이했다. 「야, 엘렌! 정말 매력적으로 보이는걸! 마치 선녀 같아! 잘해 봐, 귀여운 나의 천사야!」 자신의 옷차림이 스스로에게 무척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아는 듯, 엘렌은 이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미소를 지었다.
(하) 본문 36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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