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글로 다른 사람을 계몽하거나 훈계하려는 주제 넘는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다. “나는 이렇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게 전부다. 다른 건 없다. 나머지는 읽는 사람의 감상에 모두 맡긴다는 생각이다. --- p.6
자신감 상실과 눈치껏 처신해야 한다는 불안이 뒤엉켜 양로원행이라는 코스를 생각해낸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나는 양로원행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게 아니다. 왠지 한껏 배려하고는 있지만, 젊은 사람들에게 자신은 무용지물 같은 존재라고 여기며 자신감을 잃고 소극적인 자세로 나오는 것이 한심하다는 말이다. --- p.16
젊을 때는 나이를 먹어서 주름이나 기미는 좀 생겨도 좋겠지만 뚱뚱해지는 것만은 정말 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장 싫어하는 그 변화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싫다, 싫다 하면서도 날씬해지기 위해 식사조절을 하거나 체조를 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요즘 와서는 작년에 입었던 여름옷을 올해도 무사히 입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다. --- p.24
누가 뭐래도 노인은 젊은이보다 몇 십 년은 인생을 더 많이 경험한 사람들이다. 그 경험에 대해 젊은 사람은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경로의 날’이라는 걸 만들어 노인에게 선물을 하거나 온천에 데리고 가는 따위의 효도를 할 생각이 있다면 그날은 특별히 노인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날로 하는 게 오히려 의미가 있다고 본다. --- pp.37-38
부모에게서 자식에게로, 자식에게서 그 다음 세대로 이어져 내려가야 할 것들이 지금은 단절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예를 들면 나물 무치는 요령일 수도 있고, 옛날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손가락 장단과 함께 부르는 노래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을 아우르면서 우리의 독특한 생활문화, 역사, 나라에 대한 사랑, 이런 것들이 전해져야 한다. --- p.41
부부싸움의 진수는 벌판에서 나잇살이나 먹은 아줌마가 럭비를 하며 이리저리 뛰거나, 빨래를 널러 옥상에 올라갔다가 목청껏 산타루치아를 불러대는 식으로 마음먹은 일을 해치운 뒤의 상쾌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상처를 주면서까지 싸움에 이겨봤자 뒷맛이 개운치 않다면 기운을 낭비해가며 싸움을 한 의미가 없다. --- p.45
우리가 어렸을 적에도 이웃 집 감나무 열매를 따기도 하고 벽에 낙서도 했고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치기도 했다. 우리는 항상 흠칫거리면서 여차하면 쏜살같이 도망칠 수 있는 자세로 장난을 했다. 그 시절 어른들은 무서웠다. 어른들은 대개 두 파로 갈렸다. 아이만 보면 뭔가 심부름을 시킬 게 없는지 궁리하는 어른과 불평을 하는 어른. 그 어려운 어른들의 눈을 속이며 장난을 치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도망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장난을 묘미라는 게 바로 그런 데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 p.53
그런 식으로 건강에 좋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치고는 건강하시네요,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쾌식, 쾌면은 고사하고 내게는 쾌변뿐 아니라 즐거운 일, 재미있는 일이라곤 없다. 내가 그렇게 화를 냈더니 노모가 말씀하신다. “그만큼 날이면 날마다 제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큰 소리 치고 살면 쾌식, 쾌변 정도는 없어도 건강한 게 당연하지!”. --- p.60
나는 여자의 손이 뭔가를 씻는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여자의 손이 표정을 갖는 것은 바닥을 닦을 때보다, 빗자루를 쓸어낼 때보다 뭔가를 씻을 때이기 때문이다. 뭔가를 씻는 손은 기운이 넘치는 마음, 바쁘고 분주한 마음, 속으로 끙끙 앓는 마음, 슬퍼하는 마음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접시나 채소, 빨랫감에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물일을 함으로써 손은 위로를 받고 그것을 마음에 전한다. --- p.62
그렇게 해서 부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젊음 속에서 자기 혼자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며 자족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모습에서 반드시 젊음을 보지는 않는다. 애써 감춘 주름이나 기미보다 그 두꺼운 분칠이 오히려 감춰진 주름, 기미가 있음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노년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여자다운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여성이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빗어서 묶은 반백의 머리, 보일 듯 말 듯 살짝 바른 입술. 화장의 위력에 기대는 사람과 화장을 생활의 악센트로 생각하는 사람과의 차이일 것이다. --- p.76
지금 많은 노인들이 인생을 즐겁게 보내고 싶은 소망과 함께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죽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갖고 있다. 가족주의 안에서 노인이 대접을 받고 존경을 받던 시대에는 늙어서 병드는 것도 자손에게 맡기면 되었다. 그러나 희생을 악덕으로 여기는 요즘 같은 시대에는 식구들이 평화롭고 편하게 지낼 권리를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노인들은 오로지 다른 식구들에게 불편을 끼칠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 p.85
일찍이 노인이 노후의 행복으로 원했던 것은 마음의 평안이 아니었던가. 그것은 ‘지금 여기 있는 스스로에게 만족한다’라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쾌락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지금 이 세상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늙어도 쉽게 마르지 않는 에너지가 ‘즐거운 노후’를 갖고 싶은 생각으로 끊임없이 욕망을 부풀게 하고 이윽고 찾아올 질병이나 죽음에 대한 불안은 마치 만성질환처럼 쉴 새 없이 둔탁한 아픔을 주고 있다. --- p.90
어떤 가정에서 아이가 나쁜 장난을 쳤다. 그것을 본 아버지가 아이에게 말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엄마한테 혼난다.” 말할 것도 없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가 아이를 나무랄 때 “그런 짓을 했다가는 아버지한테 이를 거야.” 하고 아버지를 구실로 내세웠다. 일찍이 절대적인 자신감과 권력을 갖고 처자로 하여금 군말 없이 복종하게 했던 우리의 아버지들은 이제 일가의 중심으로서 긍지 가득했던, 그러나 고독했던 전당에서 내려와 자식과 비슷하게 아내의 관리대상으로 변하고 있는 것 같다. --- p.111
주변에 두루두루 신세를 지면서 67년을 살아온 몸이다. 이제 와서 ‘남에게 폐는 끼치고 싶지 않아’ 따위의 말로 폼을 잡아봐야 통하지도 않는다. 그런 배짱으로 치매에 걸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감당할 수 없는 거라면 아예 무시해버리면 된다. 이렇게 굳세게 마음먹으면서도, 가슴으로는 서늘한 바람이 지나가고 있다. --- p.135
사람은 백이면 백 사람이 모두 다르다. 이 지극히 단순하고 당연한 사실이 지금 의학에서는 무시되고 있다. 좋거나 싫거나 상관없이 병원 진찰대에 누운 이상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한 울타리에 갇힌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고 ‘데이터’일 뿐이다. 그때부터 나는 의료적인 약을 거부하게 되었다. 나처럼 까다로운 감수성을 가진 사람은 도저히 현대의학에 의지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 p.145
여자가 나이를 먹으면 수염이 난다는 것은 여자다움을 잃는다는 의미다. 여자다움을 잃는다는 것은 순종을 버리고 강해져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킨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버지에게 물어보자.”라고 말은 하지만 그때는 이미 어머니의 생각은 정해져 있고 남편을 자신의 의견으로 유도할 뿐이라는 식으로 언제부터인가 달라지고 있다. 유도하는 대로 따라오지 않을 때는 설득에 나선다. 설득이 논쟁이 된다.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과거에 잘못한 남편의 판단, 실패에 대한 기억이 총동원된다. --- p.171
요즘은 세상에 웃음거리가 넘쳐흐르는지 너나 할 것 없이 웃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런 요구를 간파한 웃음전문가들은 이래도 안 웃을 거냐는 듯이 온몸을 던져 열연을 펼친다. 그렇게 열심히 몸부림을 치는 모습을 치는 모습을 보면 웃는 쪽도 웃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모양인지 와아, 와아, 웃음이 터져나온다. 그런 텔레비전 앞에서 혼자 뚱하게 앉아 있는 내 모습은 개그보다 훨씬 우스꽝스러울 거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 p.191
온갖 관을 몸 여기저기에 꽂고 운신도 마음대로 못하고 몇 달 동안 생명을 연장하는 것과 설사 임종이 앞당겨지더라도 천명에 따라 죽어가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지를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후자를 택할 것이다. 오로지 심장이 움직이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의료행위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 지금 내 본심이다. --- p.201
지금은 오로지 한 가지, 적어도 마지막 순간은 육체적으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고생은 하지 않고 숨이 끊어졌으면 싶은 소망이 있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아무리 원해도 자신의 의지로는 어떻게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그때는 고통에 시달리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때가 되면 죽음이 끝을 내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죽음은 희망이 된다. 그런 생각조차도 죽음에 대한 준비 가운데 하나다.
--- p.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