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작품이란 실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에서 실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정임의 육체, 정임의 물리적 현존이 아니라, 내가 작품 속에 그려낸 정임의 이미지에 정임의 실재가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눈 앞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세계 속에 너무나 깊숙이 개입되어 있어서 실재의 세계를 보는 데 필요한 거리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 p.256-257
우리는 모두 자기의 고뇌밖에 모른다. <나>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종의 절대적인 긍정이다. 미친 자의 긍정이다.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다른 무엇보다도 훨씬 강렬한 힘이다. 하지만 남들에겐 나라는 것은 결국 내가 한 일, 내가 쓴 글, 지금 내 목을 죄고 있는 이 장편만이 나의 전부인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나는 하나의 대상화되는 존재다. 그들은 내가 쓴 글을 보고 나를 심판하는 인간들이다. (p.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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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이란 나를 보지 않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다. 어떤 일이 있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다. 내가 실패를 하더라도, 아무리 비열한 짓을 하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다. 내가 한 행위라든가 내가 앞으로 할 행위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나만을 사랑해주는 사람이다.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다. 그렇지, 같이 죽을 수 있을 만큼....... - 은우의 말에서
--- p.21
무엇을 할 것인가. 이 다음에 올 사회를 이야기 해 주던 삶의 좌표들, 인간에 대한 이상부의적인 이해와 역사의 발전의 합목적적인 법칙을 이야기 해주던 이론들이 사라진 거대한 사상의 빈 터 위에 나는 서 있다.앞이 보이지 않는다.차분히 뒤를 돌아보고 삶을 정리할 수도 있다.
--- p.278작가의 후기를 대신하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