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수 없어도
바다가 그리워.
볼 수 있는 걸 그리워하는 건 그리워하는 게 아니야.
아니면 정말로 그리워하는 것이거나. 병病이 되도록.
갈 수 있겠지……. --- p.32~33
진실로,
알아야 해.
손이 모자란다고 했어.
군복 만드는 공장에 손이 모자라서 내가 가야 한다고.
그때 내 나이가 열다섯. --- p.36
나는 감정이라는 걸 몰라.
외로움 같은 거 안 느껴, 못 느껴.
나 외로운 건 못 느끼는데,
남 외로운 건 느껴.
느끼고 싶지 않아도 느껴져. 맡고 싶지 않아도 맡아지는 냄새처럼.
외로운 사람을 보고 있으면 힘들어.
그래서 눈이 멀었을까. --- p.43
처음에 내가 엄마에게 말했을 때 거짓말이래.
그런 일을 겪고 사람이 살 수는 없다며.
그런 일, 내가 겪은 일.
나는 알아
내가 겪은 일을 잊은 적 없어. --- p.44~45
어느 날 동네 구장하고 반장이 우리 집을 찾아왔어. 누런 옷 입은 일본 사람을 데리고.
그들이 엄마에게 말했어.
“데이신타이에 보내야 하니 딸을 내놓아요.”
“이 집에는 아들이 없으니 딸이라도. --- p.48~49
엄마가 끝까지 거절을 못 했어.
그래도 엄마를 원망할 수가 없어.
딸을 내놓지 않으면 배급이 끊기니까.
그들이 그랬어.
“반역자가 되고 싶어요?”
“딸을 내놓지 않으면 고향에서 못 살 줄 알아요.”
그래서 내가 가겠다고 했어.
군복 만드는 공장이라는데 죽기야 할까 싶었어. --- p.50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담아본 적 없어, 일생을
…….
37년을 내 옆에 그림자처럼 있었던 사람에게도 그 말을 안 했어, 못 했어.
끝까지,
사랑이라는 걸 모르고 살았어.
못 견디게 보고 싶은 게 뭐야?
죽을 만큼 보고 싶은 게.
사랑은 내게 그 냄새도 맡아본 적 없는 과일이야.
빛깔도 본 적 없는. --- p.63
말레이시아에 있을 때는 산 너머 군부대로 출장을 가기도 했어.
그곳 산은 높지 않고 비스듬하니 길고 깊었어.
여자 여남은 명이 함께 갔어.
총을 든 군인들이 우리 앞에도, 뒤에도 있었어.
군인들이 천막으로 임시 위안소를 만들고 우리를 기다렸어.
합판으로 짠, 관
棺 같은 곳에 들어가 군인을 받았어.
개구리처럼 두 다리를 오그리고 군인을 받았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군인들이 천막을 들추고 소리치고는 했어.
빨리빨리!
저녁이 되면 두 다리가 콘크리트 기둥처럼 굳어서 펴지지 않았어. --- p.102~103
나는 집이 없어,
밤마다 집을 지어.
집을 짓고, 부수고, 짓고, 부수고…….
다들 잠든 시간에.
내가 지은 집들은 봄날 나비와 같아, 날아가버려…… 내가 그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려고 하면.
벽돌 한 장 없이 지은 집이어서.
어제도 집을 짓고, 부수고, 짓고, 부수고…… 시계를 보니 새벽 세 시.
그래도 잠이 안 와서 집을 짓고, 부수고, 짓고, 부수고…… 시계를 보니 새벽 다섯 시. --- p.104~105
군인들에게 끌려다닐 때,
나는 나를 찾지 않았어.
해방되고 다들 나를 찾을 때도,
나만 나를 찾지 않았어.
나 없이 살았어, 나 없이……. --- p.135
내가 나를 찾으려고 하니까 큰언니가 말렸어. 조카들 생각해서라도 제발 가만히 있으라고 했어.
그래도 나를 찾고 싶었어.
예순두 살에 나를 찾으려고 신고F했어.
신고하고 큰언니가 발을 끊었어.
우리 아버지, 엄마 제사 지내주는 조카들까지. --- p.136
내가 싸우고 있어…….
믿을 데가 없어…….
의지할 데가 없어…….
죽을 복.
자다가 고통 없이 죽는 거…… 그거 하나 바라…… 몸이 너무 고달프니까…… 정신이 나가 허우적거리는 병이 올까봐 두려워…….
내 나이 아흔셋…… 전생에 지은 업보는 다 치른 것 같아…….
업보를 짓고 싶지 않아, 마음으로도.
아무도 미워하고 싶지 않아,
아무도 원망하고 싶지 않아.
금방 끝날 줄 알았어…….
용서하고 떠나고 싶어.
번개처럼,
한순간. --- p.162~163
한 엄마에게서 태어난 형제도 나를 이해 못 하는데 누가 나를 이해하겠어.
형제도 못 믿는 내가 누구를 믿겠어.
너른 밭이 있었으면…….
내 뒤에 아무도 없어.
--- p.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