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들의 저항’은 역사적이고 구조적이며 계급적인 배경을 갖고 있다. 재정과 세제, 복지와 분배, 외교와 남북관계를 비롯한 국정운영 철학이 일치하는 보수(반개혁) 정부에서는 관료들이 청와대에 저항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개혁을 추진하는 리버럴 정부에선 청와대와 여당에 반기를 드는 관료가 많아지고 곳곳에서 파열음이 발생한다. 관료 집단 스스로 우리 사회의 강력한 기득권이자 특권층이기 때문이다.
리버럴 정부에선 ‘정부=청와대’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 언론은 청와대에 저항하는 관료를 찬양하고 부추긴다. ‘김동연 패싱론’을 만들어내거나 ‘살아있는 권력수사론’을 증폭시켜 권력에 저항하는 의인 프레임을 만들어낸다. 보수적 관료와 언론의 연합작전으로 개혁은 좌절하고 반기를 든 관료는 영웅이 된다. 윤석열과 최재형, 김동연의 대선 도전 스토리가 대략 이러하다. 박근혜 탄핵으로 기존 보수정치 세력이 망해버린 상황에서 현 정부에 맞섰던 관료 출신들이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들어가는 글, 정권이 바뀌어도 나아지지 않는 이유가 있다」중에서
강형욱씨에 따르면, 주인 행세하는 개를 통제하는 데 필요한 주인의 자세가 하나 더 있다. 개가 으르렁거려도 겁먹지 않는 것이다. 검찰은 기형적으로 발전해온 우리 민주주의의 빈틈이다. 국민의 힘으로 비뚤어지고 터진 곳들을 바로잡고 메워왔듯이 검찰이라는 빈틈도 메울 수 있다. 으르렁거려도 겁먹지 말자. 늑대는 집안에서 키울 수 없다. 검찰의 새로운 주인은 검찰 자신이 아니고 국민이어야 한다.
---「개와 늑대와 검찰의 시간」중에서
석열 전 검찰총장의 대선 출마는 한국 정치의 후진성이 낳은 역사적 현상이다. 정치적 쟁점을 정치가 해결하지 못하고 검찰과 사법부에 떠넘겨온 과정에서 지나치게 비대해진 검찰권력이 직접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정치의 사법화가 사법의 정치화라는 불행한 결말로 이어졌다. 레거시가 망해버린 보수세력은 정권교체 의지와 더불어 정치보복(이명박·박근혜처럼 문재인도 구속해달라!)의 염원을 담아 윤석열에 매달리고 있다. 각종 사회적 현안과 갈등 해결의 비전도 없고, 낡은 인식과 잦은 말실수에도 지지율이 버티는 배경이다. 윤석열 현상은 정치 불신과 혐오라는 반정치적 성향을 바탕으로 보복의 악순환을 예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고 퇴행적이다.
---「윤석열의 공정과 상식은 사기다」중에서
한 사회비평가가 검찰개혁을 주류 엘리트끼리의 싸움이라고 비하하는 글을 봤다. 이 비평가 말고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주변에 꽤 있다. 이들은 대체로 노동문제를 비롯해 불평등 문제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다. 문재인 정부가 불평등 문제에 별 관심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보수적인 경우도 있어서 불만이 많은 것이다. 나도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검찰개혁이 엘리트들끼리(보수엘리트:진보엘리트)의 싸움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진심으로 묻고 싶다. 검찰의 특권과 반칙과 내로남불을 없애는 게 엘리트끼리의 싸움(일뿐)인가. 검찰 출신을 민정수석과 법무부 장관으로 앉혀 노골적으로 검찰을 장악하는 권위주의 정부에선 충직한 개가 되었다가, 검찰개혁을 위해 검찰의 중립을 보장해주는 리버럴 정부가 되면 정부를 물어뜯는 불공정성을 고치자는 게 주류 지향인가. 검찰 고위직 출신 전관들은 변호사 수임도 하지 않고 전화 한 통에 몇 억씩 챙긴다. 검찰이 수사권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진짜 이유가 여기 있다. 진실을 덮어 이익을 취하는 이 편법적 비리를 근절하자는 게 엘리트끼리의 싸움인가. 오히려 제대로 된 검찰개혁을 이뤄내야만 엘리트 카르텔을 깰 수 있으며, 민주적이고 민중적인 법치주의에 이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검찰개혁이 최전선이 된 이유」중에서
일부 언론을 포함한 한국형 브라만 계급이 펼치는 공정성 논의는 공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편향적이다. 세습을 통해 면면히 이어지는 최상위 계급을 공정성의 치외법권 지대로 상정하고, 그들의 특권을 보호하기 위해 대리전을 감행한다. 피고인 이재용의 구속을 걱정하고, 상속세가 너무 많다고 푸념한다. 장례식장에 나타난 이재용의 자녀들에게 카메라 앵글을 맞추고 “우월한 유전자” 운운하는 언론의 노예 근성은 시험조차 필요 없는 세습 권력에 대한 충성 맹세이자 자발적 복종 선언인 셈이다.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은 태생에 따른 귀족주의(aristocracy) 시대가 끝나고, 부가 곧 권력인 금권주의(plutocracy)를 지나, 능력주의(meritocracy) 시대가 도래했다고 했지만, 21세기의 한국 사회는 이 세 가지 체제가 동시에 작동하는 기형적인 복합체가 되어가고 있다.
---「브라만의 무기로 전락한 ‘공정성’」중에서
이 나라의 건국세력으로서 보수우파의 권력에 대한 집요한 의지는 상식을 초월했다. 검찰권력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도저히 차기 대권이 보이지 않던 암흑의 터널을 뚫고 유력한 대선주자를 세웠다. 현 정권을 향해 칼을 들었던 검찰총장이 어떻게 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설 수 있겠느냐는 상식은 어차피 이들의 것이 아니다. 이들의 권력욕 앞에서는 모든 상식이 무용해진다. 상식을 내팽개쳐 국민의 심판을 받았던 주류가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5년 만에 다시 집권의 꿈을 꿀 수 있을 만큼 우리 사회의 상식은 허약하다. 우리 민주주의 수준이 고작 이 정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기초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겸허해져야 할 시간이다.
---「주류의 자격을 묻는다」중에서
내로남불 프레임은 도덕 기준이 높은 진보가 필패할 수밖에 없는 게임이다. 내로남불 프레임이 특히 문제인 것은 뻔뻔한 악당들이 면죄부를 받게 돼 있기 때문이다. 악당들은 나쁜 짓을 해도 사회적 관심을 끌지 못한다. 악당을 비난하며 자신은 악당이 아닌 것처럼 행세하던 사람들이 조그만 잘못에도 대역죄인처럼 비난받는다.
이 과정에서 민생은 사라지고 무의미한 정쟁만 무한 생산된다. 도덕성 경쟁이 정책 경쟁의 지우개 노릇을 하는 셈이다. 도덕성 경쟁을 하지 말라는 게 도덕성을 포기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도덕성을 정치적 상품으로 팔지 말라는 것이다. 2000년 총선시민연대 이후 정치개혁 운동으로 시작된 도덕성 경쟁은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다. 진보가 내놓아야 할 상품은 따로 있다. 기득권에 기반한 정당들이 낼 수 없는 진보적 정책이다. 우리가 덜 타락했다고 주장하지 말고 우리가 더 유능하다고 말해야 한다.
---「민주당의 세 번째 실패와 진보의 재구성」중에서
윤석열 같은 괴물이 탄생할 수 있는 독점 구조를 뜯어고치고,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검찰권력을 활용해 정치를 하거나 정치보복을 자행할 수 없도록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법률 기술자들이 국민 위에 군림하지 못하도록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고, 돈으로 법을 사는 부패의 사슬을 끊어야 한다. 이것이 법치의 근본을 바로 세우는 길이며, 대한민국의 문화와 경제적 수준에 걸맞은 정치선진화와 사법민주화로 가는 필수 관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시밭길이겠지만, 가야만 하고, 갈 수밖에 없는 길, 검찰공화국 해체의 길이다.
---「나오는 글, 개혁은 섀도복싱이 아니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