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복잡해질수록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아주 단순한 것을 원한다. 돈의 노예가 되어 폭력에 익숙해진 채 살아가면서도, 돈으로 살 수 없는 평화로운 어떤 상태와 그것을 나눌 상대를 꿈꾼다. 혈연과 이해 관계와 도덕과 존재 이유 따위를 다 떠나, 다만 곁에서 말없이 지켜주고 사랑해 줄 그 어떤 대상. 환란의 땅에서 생존 경쟁에 지쳐 돌아왔을 때 부드럽고 따뜻한 눈빛만으로 ‘걱정 마. 난 널 무조건 좋아해’라고 말해 줄 그 누구. 그의 이름을 ‘가족’이라고 낮고 조그만 목소리로 불러보면 어떨까. --- p.60
우리 곁에는 이미 수많은 ‘비정상적인 가족’이 있다. 이혼이나 사별로 인해 한 부모 가족,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양부모나 재혼 가족, 장애인 자녀를 둔 가족이나 자녀가 없는 부부, 동성애 커플 등등……. 하지만 ‘비정상’과 ‘정상’의 경계는 기실 모호하다. ‘비정상’의 수치가 ‘정상’을 넘어선다면, 그때는 무엇이 ‘정상’으로 불리려나? 그때에도 ‘정상’이란 이유로 ‘비정상’을 비난하거나 폄하할 수 있을까? (중략)
틀 속에 갇힌 채 불행하다고 아우성친다. 이토록 몸에 맞지 않는 틀이지만 깨어질까봐 전전긍긍한다. 여전히 불행한 채로 틀을 깨고 나간 사람들을 비난하고 혐오한다. 마침내는 살기 위해 ‘틀’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틀’을 위해 살아간다.
이런 억지와 고집 속에 ‘가족은 없다’는 비명이 터져 나온다. 수많은 ‘비정상’ 가족들이 넘쳐나는 가운데 ‘가족의 위기’를 외치는 목청이 커진다. 하지만 가족은 사라질 수 없다. 고립된 채 홀로 살 수 없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에게 기대고 의지할 수밖에 없다. 가족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달라질 뿐이다.
가족의 범위는 점차 다양해져 간다. 이제는 생물학적으로 규정된 가족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가족,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맺어진 가족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때다. 그리고 그들이 진정으로 ‘가족’ 속에서 행복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수정하고 사회적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
--- p.55
서로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별로 없었다.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실상 10년 전의 그들은 얼마간 서로의 차이를 인정한 관계였다. 하지만 십 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차이는 좁혀지기는커녕 지구에서 16광년이 떨어진 견우성과 26광년이 떨어진 직녀성의 거리만큼이나 멀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나 다른 서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인지 두려워서인지, 그들은 굳이 서로를 알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서로가 얼마나 서로에게 실망했고,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를 시시때때로 분주하고 고달프게 확인하곤 했다. 충분히 사랑이 식고 미움이 쌓일 만한 시간, 10년. 다른 가능성을 향해 눈이 돌아가고 그로부터 얻을 이익과 손실을 계산해 봄 직한 시기, 10년.
--- p.107
가족이 없는 사람은 없다. 어느 별에선가 휙 날아와 떨어진 운석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에게도 애초부터 가족이 없을 수는 없다. 가족은 명백한 존재의 근거이면서 삶의 원천이다. 그럼에도 가족을 갖지 못한 사람이 있다. 가족을 빼앗긴 사람도 있고, 삶의 갈피에서 그만 놓치거나 슬그머니 잃은 사람도 있다. 산산이 부서져 가는 그것을 맥없이 지켜봐야 했던 사람도 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상실과 결핍의 고통에, 있으면 있는 대로 과중한 책무의 부담에 시달리기도 한다. <중략> 갈등은 치유하고 극복해야 할 어떤 것이지 제거해야 할 악덕이 아니다. 가족에 대한 고민이 많아지고 갈등이 표면화된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행복을 위한 시도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나는 소망하기를, 부디 불행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다양한 행복이 존재했으면 한다.
--- p.244
결혼에서 삶의 이상을 찾지 못한다면 일, 학문, 사상, 봉사…… 그 어디서든 사랑의 근거를 찾을 수 있는 독신자들의 자유가 확대되기를. 결혼을 하고도 의지에 의해 자식을 낳지 않거나 부득이하게 자식을 갖지 못하는 부부들이 타인에 의해 행복을 저울질당하지 않고 스스로 희생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기를. 핏줄로 이어지지 않아도 누구보다 든든한 부모, 다정한 형제, 소중한 자식이 될 수 있는 공생과 박애의 둥지가 많이많이 생겨나 주기를.
‘서로 만나면 눈인사를 하는 곳, 위험에 처한 아이를 보면 곧 달려가 상황을 알아보고 처리를 하는 곳, 각자가 충분한 사적 공간을 가지면서 ‘공공의 목초지’ 개념을 확실하게 가지고 삶을 만들어 가는 곳, 자발성과 네트워크를 통해 여러 활동이 풍성하게 벌어지는 한편, 서로에게 무리한 부탁이나 상처를 주지 않는 성숙함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마을.’
그저 이상일까? 페미니스트 조한혜정만의 꿈일까? 결국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 샹그리라, 무릉도원일까? 하지만 나도 간절히, 그 헛되고도 지극히 아름다운 꿈을 꾸어 보고 싶다.
--- p.244
--- 본문 중에서